옛글 모음 (2005년)

대체, 의무를 어떻게 대체한다는 것인가.

褐玉 2009. 6. 15. 16:31

종교나 사상 등의 이유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 대체복무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 한다. 정부에서 한 말이니까 흰소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결정이(정부에서 한 말이므로) 합당하고 타당한 논리를 댈 수 있다면 모르겠으나 지난 성매매특별법과 같은 빈약한 논리를 내세운다면 또 한번의 뻘짓이 될 수 밖에 없다.

모름지기, 의무란 당위의 영역이 아닌가. 의무는 그냥 ‘해야 하는’ 것이지 경우에 따라서 바꿀 수 있는게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권유나 권고 따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인생의 정점을 국가에 저당잡히는 일은 투철한 애국심이 있거나 강제로 부과된 의무가 아니라면 불가한 일이다. 문득 어느 아침에 호기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그런 예외를 감내하고 선택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권이란 인간으로 태어나면 당연히 가져야할 권리다. 저 무지막지하던 폭압의 시대에는 땅바닥에 떨어진 사탕보다도 못한 것이었지만 작금의 세상에는 그 무엇보다도 존중되어야할 지고한 가치이다. 문제는 그 인권이 법과 상충되었을 때이다. 개인의 사상으로 인해 군인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인권과, 국가가 정한 특별한 사유가 아닌 이상 강제 징집되어야 하는 현행 헌법과의 마찰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마땅하다.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꾸면 된다. 그리하면 개인의 자유의지에 반해서 억지춘향으로 애국심을 발휘할 필요도 없고, 자신의 믿음이나 신념을 지키느라 국법을 어기는 무리도 발생치 않게 된다. 아주 깔끔하게 상황종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 깔끔한 방법이 현실화되기에는 그걸로 엮인 인간군상들의 이해관계가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데 있다. 결코 단박에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그래서 당장은 답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이상하게 풀어서는 안 된다. 국가라는 것은 약속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헌법은 개개의 구성원들이 모두 동의하고 합의한 것의 최소공배수의 모음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 중의 어떤 것이 명백히 옳지 아니한 것으로 판명되고 다수의 구성원이 그것에 동의하면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입법과정이다. 말인즉, 민주사회는 합리적인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야 뒷말 없이 조용한 것이다. 합리적이지 않거나 타당성이 부족한 것을 다수 국민들에게 강요할 때 반드시 거기에는 ‘합의파괴’의 무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대체는 방법이 아니다. 대체란 것은 선택가능한 등가의 여러 방법이 존재할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회사로 가는데 자전거, 버스, 전철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아침에 차가 퍼지면 그 수단들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의무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국방의) 의무를 선택하는가. 따라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행불가의 사유가 있을 때 (의무로부터) 면제될 수는 있지만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구성원 모두의 신뢰와 합의에 의해 만들어 놓은 국가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합리적 장치가 의무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도위반을 해서 범칙금이 날아오면 꼼짝 없이 내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가야 한다. 범칙금 부과에 대해 특별한 사유를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면제를 받을 순 있어도 대체를 할 수는 없다. 돈 대신 쌀이나 냉장고를 낼 순 없다는 것이다. 사소하고 허덥한 경범죄도 이럴진대 상위법인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의무를 어떻게 대체할 수 있을 손가.

한 나라의 국민이면 예외 없이 모두 세금을 내야 한다. 헌법에 명시돼 있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감세하거나 면세하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걸로 대체해서 내는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과문한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부과된 세금을 내기 싫다고 다른 걸로 대체해서 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짓이다. 세금이 타당하지 않다면 과세에 대해 문제를 삼아야 한다. 타당해서 온 국민이 합의한 것에 대해 나에게만 예외를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기본 소양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왜 정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가. 이 시점 대체복무 허용은 결코 해결방법이 아니다. “나에게 어떤 투철한 신념이 있으니 내일부터 나는 세금을 쌀로 내겠소”라고 한다면 정부는 나에게 쌀로 세금을 대체할 수 있게 해주실겐가? “내가 모시는 신이 세금은 노동력으로 내라”고 했다 한다면 아침마다 시청 앞을 빗자루로 쓰는 것으로 세금을 대신하도록 해줄 텐가?

군문제에 대한 구구한 억측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기실 군문제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정부는 왜 몇몇 사람들의 신념을 지켜주기 위해 원칙 없는 친절함을 베푸는가 하는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굳이 군대를 거부하는 이들을 군대 보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를 군에 보내고 안보내고 하는 것은 일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판단의 문제이므로 다수가 합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체복무는 그 합당한 방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자들에게 가해진 수십년간에 걸친 비인간적 행위도 끔찍한 짓이지만 그들의 신념이 국민 다수의 행복에 배치되거나 사회적 악영향을 미친다면 그것 또한 응당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전쟁을 전제로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구도 전쟁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다. 타인의 신념이 나의 안위를 보장하지 않는다. 개인이 병역의 의무를 지는 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곧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공동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배를 타고 가는데 배가 구멍난 곳은 없는지 위험한 곳은 없는지 바다에 암초는 없는지 살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자 곧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 중의 한명이 자신의 확고한 신념으로 ‘그딴짓 하지마라. 난 내 신념에 따라 그런 것 안한다’고 한다면 어찌 되는가. 셋이서 역할을 나눠서 배를 살피기로 했는데 한명은 ‘나는 실제로 살피는 대신 신의 목소리로서 듣겠노라’고 한다면?

대신할 수 있는게 있고 없는게 있다.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 누리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병역거부자들이 요구해야 할 것은 ‘대체복무’가 아니라 ‘모병제 도입’이 되어야 마땅하다.

정부는 이번 결정이 과연 선량한 다수를 역소외시키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이 신뢰로서 권한을 위임한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다. 병역거부자들의 인권만큼 징집병들의 인권도 소중하다. 그리고 대체복무가 이성으로서 납득되지 않는 이들의 주장에도 귀를 귀울여야 한다.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해주기 위한 그 정도의 열성이면 이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적극성과 열정을 보여주어야 마땅하다.

부디 정부의 이번 천명이 상식으로써 납득되는 수준의 이해를 국민들에게 주기를 바란다.




2007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