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야기

그가 없었어도 우승은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감동스러울 순 없었을 거다...

褐玉 2009. 10. 24. 21:39

왜 이리 코끝이 찡한지... 난 타이거즈 팬도 아닌데...
그가 없었다면 기아 타이거즈의 오늘 우승이 통쾌하고 재밌었을 지는 몰라도 감동스럽기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남들이 동의하건 말건... 난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천하의 이종범, 역대 한국프로야구 그 빛난 별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빛났을 별, 별중의 별, 그가 벤치 신세로 전락하며 뒷방 늙은이가 되었던 최근 몇년간 참 마음이 짠 했었다. 천하의 이종범도 이렇게 지는 것인가. 흐르는 세월은 그의 천재적 야구재능을 가차 없이 가져가 버린  것인가...

누구라도 세월을 막을 순 없다. 그의 그 빛난 재능도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왠일인지 그 누추한 세월을 참고 견뎠다. 글쎄...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내가 알지 못하겠다. 야구인생 전체를 통해 2인자도 아닌 1인자로만 살아온 그가 그 남루함을 참아낼 수 있게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나는 짐작 조차 못하겠다.

야구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신체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아직 여전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누추하게 끝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그 신산한 세월을 묵묵히 견뎌냈고, 은퇴 권유도 끝내 물리치며 선수생활을 연장했다. 어디선가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번 시즌 들어가기 전에, 팀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다른 팀에 가서라도 선수생활을 계속 하려고까지 생각했었다 한다. 타이거즈의 상징과도 같은 그가 그런 생각까지 했을 때는, 그 간절함이 어느 만큼이었을지...

어쨌든 타이거즈는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줬고, '화려'까지는 아니지만 '훌륭하게' 재기했다. (좀 벗어난 얘기지만, 대접을 받아 마땅한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배려란 측면에서 LG트윈스는 얼마나 쓰레기적인가...) 그는 재능은 소진했을지 모르지만 열정까지 소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재능이 비운 자리를 더욱 뜨거운 열정으로 채워서 그라운드를 적셨을 것이다. 40 먹은 이종범이 그라운드에서 땀흘리는 모습을 보고 후배 선수들이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졌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만한 것이다.

그래서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아의 우승을 온전히 그의 몫으로 주고 싶다. '형님'이 없었다면 우승할 수 있었을지, 아니, 우승은 하더라도 이토록 가슴찌르르한 감동의 전율을 줄 수 있었을지 하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프로 스포츠는 경기력이 다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이야기가 있기에, 전설이 있기에 프로스포츠는 더욱 재미있을 수 있고 감동을 선사한다고 믿는다. 육체의 물리력 뒤에 깔려 있는 인간적 감성이 나로 하여금 수시간을 붙들어매게 하고, 수년 혹은 수십년을 지켜보게 만든다. 적어도 난 그랬다.

형님이 멋진 홈런 한방 때려주지 못했어도, 천재적 운동신경으로 안타가 분명한 타구를 아웃카운트로 바꿔내는 절정의 수비력을 보여주지 못했어도, 현란한 발재간으로 도루를 해대며 그라운드를 휘저어 주지 못했어도, 그는 오늘 빛난 별 중에 가장 빛난 별이었음을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준건 별로 없지만 형님이 있어서 오늘 경기, 정말 재미있었다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