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야기

장효조와 최동원, 전설이 되어 잠들다..

褐玉 2011. 9. 15. 19:13



일주일여 사이를 두고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두 거인이 유명을 달리했다. 두 사람은 초창기 프로야구판을 화려하게 수놓았고, 한국 프로야구가 자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초대형 수퍼스타였다. 당대에 이미 동시대 한국야구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독보적 기량을 갖추었던 그들은, 뛰어난 선수의 기량을 가늠할 때면 지금도 어김없이 그 이름이 비교대상이자 기준점이 되곤 했다.

김현수가 얼마나 뛰어난 타자인지를 이야기하려면 꼭 장효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류현진이 얼마나 뛰어난 투수인지를 이야기하려면 필경 최동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그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빼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를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비교해야만 하는, 투타의 기준이 되는 양대 거물이었던 것이다.

안타제조기 장효조, 무쇠팔 최동원은 그렇게 한국 야구의 자산이었고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런데 황망하게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일주일 상간에 나란히 이승을 뜨고 말았다. 야구팬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고도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타자와 투수는 무엇이 그렇게도 바빴던 것인지 그렇게 총총히 팬들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쉽고 또 아쉽다..

지금은 잘 기억 나지도 않지만 아마도 나는 그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야구를 알아갔을 것이다. 야구의 묘미를 느끼고 야구의 재미를 느꼈을 것이다. 세상에 권투말고도 재미있는 스포츠가 있다는 것을 아마도 그들의 탁월한 기량을 통해 하나씩 알아갔을 것이다. 어렸을 때라 그들의 모습이 세세히는 기억나지 않는 것이 다만 아쉬울 뿐이다.

내 기억에(그리고 아마도 대다수 야구팬들의 기억에) 장효조는 '세상에서 제일 잘 치는 타자'였다. 콧수염 김봉연이 홈런타자라면 장효조는 어떻게 해서든 안타를 치는, 안타를 밥 먹듯이 쳐대는 타자였다. 기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기억이 있을 뿐이다. 통산타율이나 최다안타 등의 기록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최다안타는 아마도 일찌감치 깨졌을 테고, 통산타율은 지금도 깨지지 않은 걸로 안다) 어쨌든 '타격의 달인'이라는 타이틀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장효조의 것이다.

타자의 덕목은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장타력, 타율, 타점 능력, 선구안, 빠른 발, 도루능력, 수비력, 작전수행능력 등등. 그 모든 분야를 포함해서 역대 최고의 선수를 꼽으라면 나는 이종범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치는 것에 대한 것' 즉 타격능력에 대해서 만큼은 여전히 장효조를 따라올 선수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타자의 가장 기본적인 능력을 '치는 능력'이라고 좁힌다면 그는 역대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라고 불러도 누가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타격달인'인 것이다.

최동원은 공포의 직구를 쏘아대는(던지는 게 아니다) 투수였다. 최동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인상적인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는데, 공을 던지고 나서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잡아주지 않았을 때 안경 너머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뚱하니 바라보던 모습과, 당대 그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았던 역동적인 투구폼이었다. 특히 그의 투구폼은 아마도 그의 독보적인 투구 위력 때문인지 더욱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내딛는 왼발을 구부리지 않고 거의 세우다시피 해서는 그대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공을 뿌려댔는데 참으로 역동적인 동작이었다.

그때는 나도 어려서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프로야구 초창기에 에이스급 투수들이 뿌려댔던 그 무지막지한 연속투구들은 참으로 비인간적인 기록들이다. 오죽하면 30승 투수가 있겠는가. 장명부의 30승과 더불어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도 아마 영원히 깨지지 않을 '황당한' 대기록으로 남아있다. 좀더 체계적인 선수관리가 됐더라면, 그리고 선수협 문제로 구단주의 눈 밖에 나서 쫒겨나는 신세가 되지 않았다면 그도 선동렬처럼 롱런하며 한국 프로야구사에 좀더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장효조와 최동원은 나에게 최고의 타자와 최고의 투수로 기억되고 있다. 어떤 공도 쳐낼 수 있는 타자와 어떤 타자도 칠 수 없는 위력적인 공을 던졌던 투수.. 마치 만화주인공들처럼 두 선수는 그렇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것은 뿌연 기억 속에 상징적으로만 남아있는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다수의 야구팬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기억이 대략 비슷할 것이다. "잘 치는 타자란 것은 모름지기 장효조처럼 치는 것이고, 잘 던지는 투수란 것은 모름지기 최동원처럼 던지는 것이다." 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 속에 공유할 것이다.

케이블 방송도 없던 그 시절, 일본 야구나 메이저리그 야구를 알지 못하던 나에게 장효조는 '세상에서 제일 잘 치는 타자'였고 최동원은 '세상에서 제일 잘 던지는 투수'였다. 야구도 누군가의 밥벌이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선수들에 대한 맹목적인 신비감은 다소 사라졌지만 어린 시절 그들에게 심취했던 기억만은 아련하게 남아 있다.

온 세상이 동화 속처럼 흥미진진했던 날들의 주인공이 현실 속에서 사라져간다. 그 시절 동화 속 영웅들은 다소 비현실적인 수퍼히어로였지만, 현실의 그들은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나와 똑같이 마주하고 있는 한 인간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애잔하게 느껴진다.

목욕탕 유리처럼 뿌연 기억 속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좋은 기억을 남겨준 것에 감사하며, 그들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야구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현재형 전설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