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야기
박현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褐玉
2012. 3. 7. 08:50
아직 LG팬의 입장에서, 그는 고마운 선수였다. 쫄딱 망한 집안 LG에서 그나마 수년간 소년가장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봉중근이 팔꿈치 인대 수술로 2~3년간은 마운드에 설 수 없는 암담한 현실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기둥뿌리를 떠받치고 섰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가 없었으면 아마도 LG는 그나마 짧았던 영화도 누리지 못한 채 폭삭 내려앉았을 터였다.
그러니 팬들의 입장에서 그 아니 고마울 수가 있겠는가. 난세에 영웅 난다고, 국면이 어려워지니까 어김없이 칼 빼들고 나타난 장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현준이었다. '개장수'라는 독보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는(?) 별명도 재밌기도 하거니와 다소 개구져보이는 인상에다 마운드 위에서 가끔씩 손을 들어올려 손의 송진가루를 불어내며 짓는 표정은 매우 익살맞게 보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은 물론 성적이 출중했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게.. 그는 '좋은 놈'이었다. 무엇보다도, 사이드암 투수로서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공을 던질 뿐 아니라 낙차 큰 포크볼을 구사하는 특별함을 뽐냈던 것이다. 아무튼 상당히 희소하고 독특한 매력을 지닌 선수였고 아직 젊은 나이이기에 몸 관리만 잘 한다면 향후 10년 정도는 너끈히 활약을 해줄 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비단 LG팬 뿐 아니라 야구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들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 야구선수에 대한 승부조작 이야기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야구팬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야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야구팬이라면 적어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한두명의 '손질'로 승부를 좌지우지하기도 힘들 뿐더러, 결정적으로 야구선수라면 그렇게 할(승부조작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군에서 주전으로서 5인 선발에 들어갈 정도의 투수라면 최소한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이고 많은 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선수이다. 말 그대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성공한 선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뭔가에 아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자기가 선택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남부럽지 않은 성취를 이룬 사람들인데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거리를 하겠냐는 것이다. 게다가 그거 해봐야 무슨 큰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닌 바에야.
그러나.. 세상일이 늘 그렇듯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사고는 터지게 돼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하다. 익히 예상 되는 것이었다면 미연에 방지가 되었을 테니 오히려 사고가 잘 안 난다. 배신은 늘 수족이 때리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이다. 안 믿는 도끼는 애초에 들지 않을 테니..
나는 스포츠로 도박을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고 알지도 못하기에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선발 투수가 첫회 첫타자에게 볼넷을 주는 뭐 그런 걸로 베팅을 했다고 한다. 뭐 그렇게 하자면 얼마든 가능하다. 승부 자체를 좌우하는 것은 불가능해도 소소한 옵션을 거는 것이야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참 가지가지 한다는 느낌이 든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못하겠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 범죄가 성립하려면 범행가능성 뿐 아니라 범행동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의 기본 요건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브로커로부터 끽 해야 몇백 정도 받았다고 하는데, 비인기 스포츠의 선수들처럼 경제적으로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1군 주전 선수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냐는 것이다. 할 필요가 없는 짓에 인생을 거는 무모함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는 도무지 가능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알 수는 없으나, 추측해본다면 아마도 스포츠계 특유의 폐쇄적인 생태계와 복잡다단한 인간관계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공만 만지고 살아온 선수들이라 어쩌면 사회일반의 행동방식과 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알고 판단하는 세계가 매우 협소하고 불합리한 관행에 의지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라면 대충 알 테지만, 군대 있을 때 군조직이라는 그 웃기지도 않는 폐쇄적 생태계의 블랙코미디를 연상하면 대충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용 빼는 재주가 있는 놈이라도 그 바닥에 가면 취해야 하는 행동양태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군대는 불인정이 곧 존재 자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스포츠계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 "현준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더냐?"
물론 그 어떤 환경과 관행이라도, 근본적으로 야구선수라는 존재의 근원을 무너뜨리는 불법적 행위에 대한 잘못을 용서 받을 수는 없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 정도 판단력은 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자신이 한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걸 몰랐다 해도 죄가 되고, 알고 했다면 당연히 죄가 된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더구나 다른 문제도 아니고, 승부를 컨텐츠로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승부를 조작한다는 것은 수영 선수가 손발에 갈퀴를 장착하고 시합에 나선 것과 다를 것이 없는 행위다. 존재의 의미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인 것이다.
박현준은 더 이상 야구선수가 아니며 야구선수이어서도 안 된다. 자격상실이다. 용서해 줄 건덕지가 없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한 일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한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 구단이나 KBO의 규정과 상관없이 야구팬으로서 더 이상 그가 그라운드에 오르는 것을 보고싶지 않다. 그런 것을 보아줄 일말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는다. 믿었던 놈의 배신은 더 아픈 법이다. 처음 일이 불거졌을 때 "난 아니다."라고 부인했던 말을 믿고 싶었다. 설마 아니겠지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기대는 분노로 바뀌고 의혹은 현실이 되었다. 더 이상 자비심은 남아있지 않다.
더불어, LG구단과 KBO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속 선수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스스로의 시스템을 먼저 점검하고 보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팬들의 실망과 분노는 비단 특정 선수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방치한 구단과 KBO에게도 일정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잘 되면 내 덕이고 안 되면 제탓인 것인가. 장사가 잘 돼서 600백만 700만 관중이 들어올 때는 '이쁜 선수들'이고 잘못돼서 책임을 질 상황이 되면 '선수 개인의 잘못'인 것인가.
LG구단은 의혹이 사실이면 팀을 해체한다는 요지의 언급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냥 던진 것을 책임지라고 야박하게 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에 준하는 책임을 질 것을 엄숙히 요구하는 바이다. 30년 LG팬으로서. 그리고 KBO도 차제에 좀더 근본적인 대비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농구, 배구, 축구 등 다른 스포츠에서 일이 터지는 것을 보도고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직무유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에 넘버2 인기 스포츠인 축구에서 그 난리를 치는 것을 보았다면 몸을 사리는 측면에서라도 자체 단속이 있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단이 났다. 야구팬으로서 용서하기 힘든 부분이다.
야구에서 승부조작이 아예 없으면 없지, 만약 있다면 한 두명이 관련된 문제가 아니고 어제 오늘 일도 아닐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의혹은 현실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파헤칠 것인가의 문제가 더 큰 일이다. 물론 적정한 선에서 매조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뿌리 파다가 나무를 거꾸러뜨릴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KBO가 여기서 올해 장사를 연연하며 수습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역시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충분히 반성하고, 책임질 부분은 분명히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던 암흑기가 다시 도래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지금 장사 걱정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선수 한 둘 이상한 놈으로 만들고 끝나지 않길 바란다. 도려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팬들은 떠나간다. 야구장에만 금방석을 깔아 놓은 것 아니다. 인기는 언제든 식을 수 있으며 손님은 다른 가게 가서 놀면 된다.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는 사람 구경은 못하고 파리하고 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