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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언어생활

[재밌는 언어생활] 시건.. 시건.. 그것이 알고싶다.

'시건'이란 말이 있다. 아마도 내가 알기로, 경상도 지역에서만 쓰는 말로 알고 있는데 암튼 이 지역에서는 무척 많이 쓰는 말이다. 대개 나이 좀 드신 어른들이 주로 쓰는 말이고, 나처럼 시건이 안 든 넘들은 나이 먹어서도 계속 듣게 되는 말이다. "언제 시건이 나겄노. 이 노무 손이.."

어릴 때부터 언어에 대한 '감'은 다소 남다른 데가 있어서 말을 분석하고 유추하고 그런 걸 많이 했는데, 유독 이 '시건' 만은 도무지 그 유래를 알 수가 없어서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내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인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명확한 뜻을 가지고 있고 광범하게 쓰는 말이니 족보가 있을 것이 분명한데 도무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외삼촌으로부터 얼핏 그 해답을 들을 수 있었다. 외삼촌 왈, 시건은 '소견'이라는 것이다. 그때는 명확하게는 이해가 안 됐지만 그런가 보다(그럴싸 하다) 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넘어갔다.

이후에 어느 시점엔가 나는 과연 시건이 '소견'이 맞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짱돌을 굴려도 그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소견'이 '시건'으로 바뀌는 언어의 변화과정을 짚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건이라는 말은 세건이라고도 한다. 생각컨대 두 개 다 광범하게 쓰인다. 특별히 용법에 차이는 없는 듯하다. 그리고 대개 '시건이 있다/없다', '시건이 났다', '시건이 든다' 등으로 쓰인다. 흔히 쓰는 말로 하자면 '철'이라고 하면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말이다. 예컨대 철이 없는 것을 경상도에서는 '시건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감상 이 지역에서는 '철이 없다'는 말보다 '시건이 안 들었다'는 말이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철이 안 든 것은 '그냥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느낌이라면, 시건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사람이 안 된 듯한' 절박함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듣는 쪽에서는 썩 '유쾌하지 않은' 표현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좀더 투박하고 향토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구조를 이해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자기의 위치와 분수를 알고 거기에 맞게 잘 대처해 가는 것. 이것이 시건이 드는 것이다. 요컨대, 책임감도 가져야 하고 투철한 사명감으로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려고 노력하게 되면 시건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참 무섭고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여하튼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건이 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요즘은 시건 없는 짓을 해도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시절이 되었으니 이 말의 의미도 일정부분 퇴색해가고 있는 듯하고 아마도 우리 세대가 늙은이가 되면 잘 안 쓰게 될 것같은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 말이 가지고 있는 그 절절한 어감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중에는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뜻은 없어질 것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세상에 적절히 맞추어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고, 튀는 짓을 하면 유치하다거나 어리석다는 말을 듣게 되는 일이 점점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시건 없는 짓이 창조력이 되거나 경쟁력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게 된 것이다.

아무려나, 이 시건이라는 것은 아직까지는 정감있는 표현이다. 누군가에게 강요하듯 쓸 생각은 없지만 그냥 재미로 쓸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용어를 공유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시건'의 어원분석과 변화과정을 짚어보면서 허덥스런 글을 끝내고자 한다. ^ ^

앞서도 언급했지만 시건은 소견이 원형일 것으로 생각된다. 소견(所見)은 말 그대로 어떤 것에 대한 견해가 생기는 것을 뜻한다. 보는 바, 생각하는 바가 생긴다는 것인데, 생각이 생긴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리분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소견이 생기면 어뚱한 짓, 터무니 없는 짓, 유치한 짓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 소견이 시건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유추해 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소견 → 쇠견 → 세건 → 시건

소견이 쇠견으로 'ㅣ'모음이 덧붙는 것은 서울말에서도 소고기를 쇠고기라고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흔히 일어나는 음운변화이고, 쇠견이 세건으로 변하는 것은 'ㅚ', 'ㅕ' 와 같은 복잡한 복모음들이 'ㅔ'나 'ㅓ' 처럼 발음하기 쉬운 모음으로 바뀌는 것을 경상도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경상도에는 'ㅚ'나 'ㅕ'와 같은 발음이 거의 없다. 그러니 쇠견은 당근 세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 지역 출신 모 전직 대통령이 경제를 '갱제'라고 발음한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세건이 시건으로 변하는 것 또한 이 지역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발음하기 쉬운 'ㅔ'조차도 여기서는 더 쉬운 'ㅣ'로 바꿔버리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알기 쉬운 예를 들자면, 세상을 '시상'이라고 한다. "시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소." 하고 쓰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나 더 용례를 든다면 '세게'도 이 지역에서는 흔히들 '시게(씨게)'라고 한다. "씨게 때리라니까" 하면 세게 때리라는 말이다.

이렇게 '소견'이 '세건' 또는 '시건'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뭐, 나는 학자가 아니므로 책임은 못 진다. ^ ^ 하지만 아마도 그것이 맞을 것이다. 혹 아니라면 이 글을 읽는 분이 가르쳐 주시길 바라며,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