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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 모음 (2005년)

정수근의 헐리우드 액션은 팬들에 대한 무례



그라운드의 꾀돌이 정수근 선수가 또 재미난 플레이를 한 건 선보였다.

홈으로 뛰어들어오는 순간 공잡은 포수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고, 가까스로 포수를 피한 정선수는 다시 홈으로 팔을 뻗어 홈플레이트를 짚었고 심판은 '세잎'을 선언했다. 완벽한 꾀돌이의 승리였다.

근데 왠걸?.. 최초 홈으로 쇄도하던 순간 정수근은 이미 포수의 태그에 아웃된 상태였고 시침 뚝 떼고 다시 홈을 터치하는 '헐리우드 액션'을 선보인 것이다. 근데 묘하게도 여기에 두가지 인간적 실수가 개입되었다. 하나는 심판이 뒤에 있어서 태그 상황을 보지 못한 것이고, 두번째는 경험이 적은 초보 포수 용덕한이 이미 태그를 한 상태인데도 홈으로 다시 파고드는 정수근을 태그하기 위해 또한번 액션을 취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두 번째는 실패했고 그 상황만 파악한 심판에 의해 정수근의 플레이는 세잎으로 판정된 것이다.

정수근은 완벽히 '한건' 한 것이고, 스스로도 심판이 보지못한 모양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자, 이것은 과연 재치만점 선수의 신묘한 플레이일까 아니면 비양심적인 더티 플레이일까..

인터넷에서도 온통 갑론을박이 난무하는 듯하다. 내가 야구에 뭔 식견은 없지만 그래도 프로야구 출범때부터 20여년간 보아온 눈치밥은 있으니 한입 거들어도 될 듯하다.

어떤 이들은 정수근의 플레이가 선수로서 최선을 다 한 것이기에, 그리고 판정도 스포츠의 재미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 부분 인정한다. 하지만 난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지적하고 싶다.

만약 스포츠가 규정을 위한 것이라면, 또는 팀을 위한 것이라면, 또는 선수 개개인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난 야구는 팬들의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 어떤 선수의 화려한 플레이도, 위대한 기록도, 인간승리의 눈물도 모두 팬들의 것이다.

심판도 오심할 수 있다. 당연히 심판의 오심도 게임의 한 부분이다. 선수가 게임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심판을 속일 수도 있고 상대 선수를 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팬을 속여서는 안된다. 그건 팬을 위한 기본적인 도리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만약 정 선수가 스스로도 태그 됐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했다면 최선을 다한 플레이로 당연히 팬들도 박수를 쳐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우연성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초보 포수의 더듬이질과 심판의 부주의가 겹쳐서 스포츠의 재미 중의 하나인 우연성이 또다른 재미를 선사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건의 경우 정선수는 명백히 자신이 '태그아웃'된 상태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헐리우드 액션을 한 것이다. 그걸로 사각지대에 있었던 심판을 속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카메라를 속일 순 없었고 따라서 팬들의 순수한 기대를 배반하는 결과를 낳았다.

최선을 다한 행동이 꼭 칭찬받는 것은 아니다. 도둑이나 사기꾼이 최선을 다하면 그것을 칭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과 뿐만 아니라 동기와 과정이 정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1점을 얻은 플레이는 칭찬해줄 만한 것이지만 그 동기와 과정이 팬들을 기만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선수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정 선수는 이번 일을 계기로 팬들이 왜 야구를 보는지 다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재치있는 플레이는 야구규정과 팬들의 인정하에 가능한 것이지, 자신의 독단으로 '요령껏'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그것은 열심히 한 다른 많은 선수에게 무력감을 선사하는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팬들은 정상적인 플레이 하에서의 '재치'를 바라는 것이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재치는 바라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는 정수근을 '재치 야구'를 하는 선수로 기억하고 싶지 '요령 야구'를 하는 선수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이번 일은 정선수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사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니다. 서로 최선을 다 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니까. 선수라면 그정도 승부욕과 애살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특별히 정선수는 그런 면에서 발군의 모습을 보여왔다. 다만,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이 시점에서 정선수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고 팬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정도의 '센스'를 기대하는 건 지나친 바람일까..




2005년 6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