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人不仁,以百姓為芻狗。
天地之間,其猶橐籥乎﹖
虛而不屈,動而愈出。
多言數窮,不如守中。
<褐譯>
천지는 너그럽지 않으니
세상 온갖 것을 장난감 인형처럼 다룰 뿐이네.
성인은 너그럽지 않으니
나라 백성을 장난감 인형처럼 다룰 뿐이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아
텅 비어 있으면서도 구부러지지 않고
움직일수록 오히려 더 나오는구나.
말이 많으면 자꾸만 궁색해지느니
가만히 가운데 지키는 것만 못하리.
<褐解>
天地不仁,以萬物為芻狗;聖人不仁,以百姓為芻狗。
천지란 것은 세상을 뜻하는 말로, 요즘 말로 우주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살아가는 존재의 바탕을 총제적으로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노자는 5장 첫머리에서 "이 우주는 너그럽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는데, 나는 이 말이 참으로 명쾌하게 느껴진다. 유가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인(仁)을 부정했다는 측면에서 유가와의 대립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구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세상의 이치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명쾌한 구문으로 인식하고 있다. "천지에 무슨 인함이 있느냐, 쓸 때 쓰고 버릴 때 버릴 뿐이다."
'너그럽다' 혹은 '어질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정의 발로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세의 관계에서만 유용한 개념일 뿐, 이 세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원리로는 적절치 않은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 너그럽거나 어진 것이 있을 쏘냐. 이 세상은 다만 스스로 그러한(自然)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천지가 만물을 대하는 것은 인(仁)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필요(必要)와 불요(不要)의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필요할 때는 중히 쓰고, 필요치 않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매정한 것과는 다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仁)이니 정(情)이니 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일 뿐이다. 천지가 움직이는 것은 다만 쓰임에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인간의 방식이 있으므로 인간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은 인(仁)일 수도 있고 또는 정(情)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일 때는 천지의 길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천지의 길이 인간의 길보다는 보다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인이 필요한 상황일 때는 인을 베풀되, 인이 불요한 상황에서는 어리석게 인을 붙들고 같이 망하는 길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가차없이 버리고 천지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큰 길이고 그것이 큰 행동이다.
天地不仁. 천지는 근본적으로 인하지 않은 것이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자가 영양을 잡아먹는 것은 인(仁)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자에게 무슨 너그러움이 있겠는가. 사자에게 인과 정이 있다면 사자는 모조리 굶어죽고 말 것이다. 인(仁)은 다만 인간의 것일 뿐, 사자에게는 필요치 않은 것이다. 달리 얘기한다면, 배가 부른데도 짐승을 잡아먹는 인간이 오히려 불인한 것이다. 사자나 호랑이는 자신이 위협을 받거나 혹은 배가 고픈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다른 짐승을 해하지 않는다. 미물인 짐승도 필요(必要)한 상황과 불요(不要)한 상황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욕(欲)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 불인(不仁)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다.
천지는 필요에 따라 움직이므로 인하지 않은 것이다. 장난감 인형이 필요할 때는 소중히 여기지만 필요없을 때는 내팽개 치는 것이 천지의 방식이다. 사사로운 것에, 또는 필요치 않은 것에 집착하는 것은 천지가 움직이는 방식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장난감 인형은 그것을 쓸 때에 비로소 가치를 발현하는 것일 뿐 쓰이지 않을 때는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쓰임이 곧 그 존재를 규정한다'는 도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성인 또한 마찬가지다. 성인은 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도의 방식에 따라 사람을 다스린다. 성인이 사사로운 정에 연연한다면 전체를 그르치므로 다만 필요에 따라 사람을 대할 뿐이다.
天地之間,其猶橐籥乎﹖ 虛而不屈,動而愈出。
노자 5장은 내용이 좀 파편적이다. 앞의 '천지불인'으로 시작되는 문장과, 이 '천지지간'으로 시작되는 문장이 내용에서 그다지 큰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이 다음에 오는 마지막 문장(多言數窮,不如守中)도 또한 앞의 문장과 크게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아마도 별개의 구문들이 특정한 내용의 연관성 없이 묶여서 한 장을 이룬 것같다.
이 문장에서는 천지의 움직이는 모습을 비유하여 도의 움직이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이 우주가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풀무와도 같아서 텅 비어있으면서도 구부러지지 않고, 움직일수록 오히려 더 나온다고 묘사하고 있다. 풀무라는 것은 아마도 이 글이 쓰여졌던 당시에, 상당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정교한 기계장치였을 것이기 때문에 그 신묘한 작동원리를 우주의 움직임에 비유해서 설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노자 시대에 컴퓨터가 있었다면 아마 컴퓨터로 비유했을 지도 모른다.
'虛而不屈,動而愈出(텅 비어있으면서도 구부러지지 않고, 움직일수록 오히려 더 나온다)'이라는 표현 속에 도의 움직이는 원리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도 계속 표현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비어있으면 쭈그러져야 되는데 쭈그러지지 않고, 움직이면 계속 고갈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욱 더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반대로, 도의 역설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유용한 것이고, 하나를 지니고서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때에 따라 계속 바꿔 쓰는 것이 더욱 유용한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多言數窮,不如守中。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 문장은 다른 문장과 다소 이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의 경구(警句)로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말을 많이 하면 자꾸만 궁해지니, 가만히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낫다." 간결하면서 삶의 지침으로 삼기에 더 없이 좋은 내용이다. 말이란 것은 아무래도 내용(생각)을 온전히 담기도 힘들 뿐 아니라 전달되는 과정에서 로스(loss)가 생기기 때문에 자꾸만 많이 하다보면 그 로스들이 모여서 나중에는 수습하기 힘든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러니 가급적 말을 속에서 삭이고 삭이는 것이 살아가는데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5장 끝.
노자 도덕경 왕필주 (老子道德經王弼注)
天地不仁,以萬物為芻狗;
天地任自然,無為無造,萬物自相治理,故不仁也。仁者必造立施化,有恩有為,造立施化則物失其真,有恩有為,列物不具存,物不具存,則不足以備載矣。地不 為獸生芻,而獸食芻;不為人生狗,而人食狗。無為於萬物而萬物各適其所用,則莫不贍矣。若慧由己樹,未足任也。
聖人不仁,以百姓為芻狗。
聖人與天地合其德,以百姓比芻狗也。
天地之間,其猶橐籥乎﹖虛而不屈,動而愈出。
橐,排橐也。籥,樂籥也。橐籥之中,空洞無情,無為故虛,而不得窮,屈動而不可竭盡也。天地之中,蕩然任自然,故不可得而窮,猶若橐籥也。
多言數窮,不如守中。
愈為之則愈失之矣。物樹其惡,事錯其言,不濟不言,不理必窮之數也。橐籥而守數中,則無窮盡,棄己任物,則莫不理。若橐籥有意於為聲也,則不足以共吹者之 求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