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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역해

노자 도덕경 4장

道沖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解其紛;
和其光,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象帝之先。


<褐譯>

도는 비어 있으니 그 쓰임새가 다하는 바가 없도다.

깊어라. 온갖 것의 으뜸같구나.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니 얽힌 것을 풀고,

튀는 빛을 누그러뜨리니 티끌먼지를 고르게 하는구나.

깊도다. 있는 것 같도다.

나는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하나

하느님 보다 먼저인 것같네.



<褐解>

道沖而用之或不盈

도의 모습을 형용하고 있다. 비어 있으니 그 쓰임이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조금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과연 그러하다. 우리는 흔히 뭔가가 가득 있어야 제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한정된 쓰임 밖에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로 특정되어 있으면 그것으로 밖에 쓰일 수 없다. 무언가로 가득차 있으면 다른 쓰임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고정되고 한정된 것은 도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노자가 형용하는 도의 모습은 언제나 매우 역설적이다. 굳은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이 더 강한 것이라고 하는 식이다. 이 장에서도 '가득 찰 수록 별 쓸모가 없고, 텅 비어 있을 수록 오히려 쓸모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는 물론 먼저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소유일 필요는 없다. 다만 그냥 '쓰는' 행위를 통해서 가치가 발현될 뿐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쓴다는 가치를 발현하기 위해 굳이 소유가 전제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유하지 않으면 더 많은 쓰임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전복적인 가치관이기는 하지만 한편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논리이다. 쓰임은 쓰임으로써만 가치가 나타나는 것이니 그 쓰임이 다 했을 때는 다시 쓰임을 비운다는 것이다. 쓰임이 다했을 때도 그 쓰임을 비우지 않으면 다시 다른 쓰임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생산적인 것이며 부자연한 것이다. 하나의 욕(欲)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욕(欲)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도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挫其銳,解其紛

세상을 살아가면서,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문제를 끝내는 데는 유용할지 모르나 문제를 푸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안 보는 방법을 취하는 것은 그 문제(껄끄러운 관계)를 끝내는 데는 유용하겠지만 인간관계라는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로 유용한 방법이 아니다. 요는, 문제를 '끝내느냐, 해결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날카로운 것은 얽힌 것을 풀 수 없다. 칼로는 얽힌 실타래를 끊을 수는 있을 지언정 풀 수는 없는 것이다. 부드러운 것이어야만 꼬이고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이라는 서양의 전설이 있다. 이는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된 전설로서, 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자가 소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신탁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데 그 매듭은 매우 정교한 것이어서 누구도 그 매듭을 풀 수 없었다. 이때 알렉산더는 칼로 그 매듭을 끊어버림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전설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함의가 있어서 한 가지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노자 4장의 이 문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생각난다. 알렉산더는 결국 문제를 풀지 못한 것이다. 그는 단지 문제를 없앴을 뿐인 것이다. 매듭을 자르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콜럼버스의 달걀이 있다. 아무도 달걀을 세우지 못했을 때 달걀을 탁 깨서 탁자 위에 세운 콜럼버스의 해결책. 이 또한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 그도 문제를 없애버린 것에 불과하다. 모든 문제는 그 문제를 성립시키는 일정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그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그것을 무시한 것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 축구에는 공을 손으로 잡으면 안 된다는 룰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공을 손으로 잡아서 골대 안으로 던졌다면 아무도 그것을 골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다.

편의적이고 작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효율성을 중시하는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의 일단일 뿐, 결코 진지한 삶의 자세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이보게, 칼로는 실타래를 풀 수 없는 것이라네. 날카로운 것으로 여린 것을 보듬을 수는 없는 것이지." 하고 말이다. 날카로움의 효율은 실이라는 가치를 살려낼 수 없다. 끊어진 실은 이미 가치를 상실해버린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접근해야 하는 것은 실의 가치이지 끊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주객이 전도된 이런 모순을 바로 보지 못할 때 인간세상은 혼돈 속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방법화하는 것은 실로 위험한 사고방식인 것이다.


和其光,同其塵

엔트로피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열역학 제2법칙으로, 우주가 닫혀진 계(界)라고 할 때 에너지는 반드시 가용(可用)한 것에서 불용(不用)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콩 한 되와 팥 한 되를 큰 통에 넣고 흔들면, 흔드는 양과 시간에 따라 콩과 팥이 점점 섞이게 되는데 그 섞이는 과정은 무질서가 증대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콩과 팥으로 각각 나눠져 있을 때는 순도가 높은, 즉 유용한 상태로써 가용성이 높은 에너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한데 놓고 흔들면 균일하게 섞이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는 외부에서 일정한 에너지가 다시 가해지지 않는 한(콩과 팥을 골라내는 행위) 절대로 다시 콩과 팥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이처럼 자연상태에서 모든 에너지는 가용한 상태에서 불용한 상태로만 움직인다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우주에서 에너지의 흐름은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만 움직이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이야기하는데 느닷없이 엔트로피의 법칙을 갖다붙인 것은, 노자가 도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티끌(먼지)을 가지고 비유를 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디든 먼지가 없는 곳은 없다. 다만 많고 적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잘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먼지는 어디든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먼지를 일정하게 정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먼지는 극단적으로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먼지를 일정하게 고르는 것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방 안에 문을 닫고 있으면 우리는 먼지의 존재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문을 열어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나뉘어지게 되면 그때 비로소 먼지의 존재를 알게 된다. 무수한 먼지들이 어지러이 허공을 떠다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규칙하고 무차별적인 먼지의 움직임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고르게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는 먼지의 움직임은 그 자체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므로 그것을 고르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을 튀게 만드는 것, 즉 빛을 누그러뜨리는 방법밖에 없다. 빛을 부드럽게 만들면 먼지도 고르게 되는 것이다.

날을 무디게 해서 얽힌 것을 풀고, 빛을 누그러뜨려서 먼지를 고르게 하는 것이 스스로 그러함의 길, 즉 도의 방식이다. 원초적으로 그러한 것은 억지로 뭔가를 해서 질서를 잡으려 하지 말고 그냥 결대로 맡기는 것, 그것이 도에 가까운 방식이라는 것이다.


湛兮似或存。吾不知誰之子,象帝之先。

이와 같은 도의 원리는 분명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알 순 없으나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니며 그 이전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느님(帝)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 가장 원초적인 것이며 가장 본질적인 것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 하느님 조차도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니, 도라는 것은 천지가 움직이는 원리로써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저 너머에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4장은 도의 모습과 그 움직임의 원리 그리고 그것의 원초적인 존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분히 상징적인 수사들로써 구성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1,2장에서 이야기한 것과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4장 끝.


노자 도덕경 왕필주 (老子道德經王弼注)

道沖而用之或不盈,淵兮似萬物之宗;挫其銳,解其紛,和其光,同其塵,湛兮似或存。吾不知誰之子,象帝之先。

夫執一家之量者,不能全家。執一國之量者,不能成國。窮力舉重,不能為用,故人雖知,萬物治也,治而不以二儀之道,則不能贍也。地雖形魄,不法於天則不能 全其寧。天雖精象,不法於道則不能保其精。沖而用之,用乃不能窮滿以造實,實來則溢,故沖而用之,又復不盈,其為無窮亦已極矣。形雖大,不能累其體,事雖 殷,不能充其量,萬物捨此而求主,主其安在乎。不亦淵兮似萬物之宗乎。銳挫而無損,紛解而不勞,和光而不汙,其體同塵而不渝,其真不亦湛兮似或存乎。地守 其形,德不能過其載,天慊其象,德不能過其覆,天地莫能及之,不亦似帝之先乎。帝,天帝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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