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玄之又玄,
衆妙之門。
<褐譯>
도라 한다면 도가 될 뿐, 늘 그 도인 것은 아니지.
이름한다면 이름될 뿐, 늘 그 이름인 것은 아니지.
이름되지 않을 때 세상 모든 것은 제 모습 그대로이고
이름되니 세상 모든 것이 거기서 생겨난다네.
그러하므로,
바라는 것 없다면 그 오묘함을 보게 되지.
바라는 것 있다면 그 쓰임새를 보게 되지.
이 둘은 같은 거라네. 드러나 그 이름을 달리 했을 뿐.
그 같음을 일러 거뭇하다고 하는데, 거뭇하고 또 거뭇하구나.
뭇 신비로움의 문일진저.
<褐解>
너무나도 유명한 현행본 노자 제1장이다. 이 장은 해석자에 따라 그 해석의 결과에 상당한 편차가 있어서 다양한 견해로 노자 이해의 장을 넓히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괴력난신이 출몰하는 환타지 세계와 같이 노자 이해의 장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어쨌든 매우 중요하면서도 또한 매우 모호한 장이다. 이 노자 제1장은 백서본과 달리 현행본 체제에서는 제일 첫머리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게 된 것같다. 그것은 또한 현행체제로 편집한 최초 편집자의 의도가 뚜렷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호하거나 말거나 이 1장을 어떤 식으로든 해석해야 그에 따라 도덕경 전체의 틀을 가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자신, 이 노자 제1장의 해석에서 기존의 해석과 조금 상이한 견해를 가지게 되어, 그 틀에 따라 노자 도덕경 전체를 다시 조망해보면서 나름의 독자적인 해석을 하게 되었기도 하다. 어쨌든 이 1장이 전체 노자의 방향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나도 그 해석의 틀을 제시하는 측면에서, 서두부터 좀 번잡스럽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잡설을 좀 늘어놓으려 한다.
한자문화권에서 도(道)라는 단어는 매우 친숙한 단어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도가 텄다”와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쓰일 정도로 도라는 것은 우리에게 완벽하게 체화되어 있는 개념이다. 그 뿐 아니라 발차기를 잘 하면 '태권도'가 되고, 차를 잘 마시면 '다도'가 되고, 장사를 잘하면 '상도'가 된다. 여하튼 뭐든 잘 하면 '도인'이 되는데 이렇게 생활 속에서 도인이 된 사람들을 우리는 숱하게 만날 수 있다.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속에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반복해서 쌓인 것이 내 몸에 길을 내면 그것이 흔히 말하는 '도가 튼다'는 것이다. 손과 발을 계속 내지르다 부지불식간에 내 몸에 착 달라붙는 어떤 방법이 생기면 그것이 '태권道'가 되고, 차를 계속 마시다 어느 순간 차를 마신다는 행위가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 차와 내가 하나가 되는 몸의 길이 생기면 그것이 다도(茶道)가 되는 것이다.
도는 길이고 길은 방법을 뜻하는데, 도는 곧 사람의 몸을 통해 구현된 하늘의 길이라는 것이다. 즉,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인가, 방법인가' 하는 것이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할 수 있겠다. 노자의 메세지는 단순하다. 사람의 생각과 행위 또한 천지의 길과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 길 밖에 없다. 그런데 그 길(道)은 무엇인가.
도란 무엇일까. 노자가 이 말을 자신의 사상의 핵심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분명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제일 적합했기 때문에 선택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도가 텄다’는 말은 ‘길이 났다’는 뜻이다. 도는 길이고 길은 당위의 세계이다.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똑바로 가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불편과 실패만 따를 뿐이다.
숲이 우거진 산길을 간다고 생각해보자. 그 산에는 아마도 숱한 앞선 이들의 발길에 의해 저절로 형성된 길이 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해야할 것은 두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만약 길이 없는 곳으로 간다면 필시 웅덩이에 빠지거나, 산짐승을 만나거나, 더 험한 길로 가게 되거나, 한참을 빙빙 둘러가게 될 것이다. 즉, 길이란 것은 오랜 시행착오의 반복에 의해 가장 빠르고, 쉽고, 안전한 최적의 코스로 만들어진 것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대개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길(道)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관계 없이 길(삶의 가장 훌륭한 방법)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길을 따른다면 바른 삶을 얻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조금 불편하거나 적절치 않은 삶을 얻을 것이다. 인간사회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길을 벗어났다면 언제고 다시 길을 따라가면 된다. 길은 어디 숨어있지 않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있다. 길을 볼 수 없어서 길을 못따르는 것이 아니라 애써 외면하기 때문에 길을 못찾는 것이다.
길은 진리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하고, 효율적인 삶이기도 한, 마치 엄마와 같은 것이다. 때로는 의심되더라도 묵묵히 따른다면 언젠가는 길 속에서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고 종내 훌륭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엄마는 절대로 삿된 길로 자식을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가 왜 하고많은 단어 중에 길로써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을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따르지 않을래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르지 않는다면 다만 어리석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잡설은 이쯤에서 줄이고, 이제 노자가 말하는 그 도에 조금 더 다가가 보자. 도는 편한 것이고 가장 효율적인 것이기 때문에 따를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도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가장 좋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도라는 것이 흔히 말하듯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세상의 이치’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기존의 해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道를 道라고 하면 진짜 道가 아니고...”와 같은 말은 마냥 난해할 뿐이다. "니가 생각하는 그건 진짜가 아니야." 라든가 "니가 보고있는 것은 실체가 아니고 허상일 뿐이야."와 같은 것은 애써 어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표현이 어려울 순 있으나 전하고자 하는 뜻은 쉽다'는 것이 내가 노자를 읽는 초지일관한 방식이다. 그래서 내 말은 이런 것이다.
도는 어려울 수 없는 것이다. 도는 꼴뚜기든 망둥어든 쉽게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렵다고 한다면 그것은 노자의 본질적인 의도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41장, 70장 참조) 도는 ‘~이 아닌’이 아닌, ‘~이기도 하고, ~같기도 한’이라는 것이다. 자, 들어가겠다.
노자의 첫문장을 보자. 첫문장은 다음과 같다.
道可道非常道
요상하게 생겼다. 딱 여섯자로 이뤄진 문장에 같은 글자가 세 글자나 된다. 즉, 문장의 반이 동일한 글자로 된 희한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한문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뭔가 만만치 않을 듯한 포스를 풍기는 것이다. 경상도 말 우스개 '가가가가가(그 아이 성이 가氏냐)'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이 문장은 대개 두번째 道자에서 끊어 읽어 '도를 도라고 하면 만고불변의 도가 아니다' 혹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와 같이 새긴다. 사실 앞의 것은 좀 무리가 있는 해석이고 뒤의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난 이것도 취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기존의 해석은 본질의 도(常道)라는 것이 있고 도라고 말해진 도(可道)가 있는데 이 둘이 다르다(非)는 것이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본질의 도를 더 가치상위(價置上位)에 두는 입장이다. 하지만 나의 해석은 이와 조금 다르다.
나는 그다지 한문에 능한 사람이 아닐 뿐더러 문장을 나눠서 분석하는 것을 별로 즐기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 문장만 좀 그렇게 해야겠다. 그래야 내가 이 문장을 달리 해석하게 된 과정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첫문장 말고는 앞으로 이와 같은 설명방식을 취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사실 그럴 실력도 안 된다.^ ^; 아무튼 이 따위 짓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대부분의 분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며 같이 좀 읽어나가겠다.
道可道非常道
이 문장에는 道라는 글자가 세개가 나오는데 이 세개의 도의 의미를 확실히 하면 전체 문장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한번 살펴보자. 일단 어느 나라 말이든 문장의 제일 첫머리에 오는 단어는 대개 주어로 봐야하는데, 특히나 명사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첫번째 道자는 '도는' 혹은 '도라는 것은' 정도로 새길 수 있겠다. 그 다음 可자가 나오는데, 이 문장에서 非자와 함께 크게 문제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글자다. '~할 수 있다', '~될 수 있다' 정도로 새기면 무난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오는 두번째 道자인데,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반부의 道可道 세 글자로 된 문구의 뜻이 달라진다. 기존에는 '도를 도라고 한다면' 또는 '도라고 할 수 있는 도' 등으로 해석이 되어 왔다. 그런데 첫번째 도가 주어이고 그 다음 可가 조동사이기 때문에 두번째 도는 본동사가 될 수 밖에 없다. 한자는 뜻글자라서 위치에 따라 품사가 정해지는데, 대개 명사로 쓰이는 글자가 술어로 쓰일 때는 '~된다', '~답다', '~스럽다' 정도로 해석된다. 논어에 나오는 '君君臣臣父父子子'와 같은 문장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可道는 '도가 될 수 있다', '도라고 할 수 있다'로 읽을 수 있고, 주어로 쓰인 첫번째 道까지 붙여서 읽으면 '도는 도가 될 수 있다', '도는 도라고 할 수 있다'가 되는 것이다. 道道이면 '도는 도이다'가 될 것이고, 道可道이니 '도는 도일 수 있다'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현행본 보다 더 고본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백서본에는 道可道也,非恒道也라고 되어 있다. 常과 恒은 같이 쓰는 글자이다. 也로 문장을 끊어놓아 어감적으로 훨씬 더 내 해석의 느낌이 잘 다가온다.
道可道非常道
앞의 세 글자보다는 사실 뒤의 세 글자 때문에 이 전체 문장이 모호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일단 非는 '아니다'가 되겠고 따라서 그 뒤의 두 글자 常道는 명사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非는 명사를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만약 동사를 부정하려 했으면 不이 되었을 것이다. 非行과 不行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非行은 '아닌 행동'이고 不行은 '하지 마라'의 뜻이 된다. 어쨌든 非常道는 '常道가 아니다'로 새길 수 있는데, 나는 이 常道를 '늘 그러한 도'라고 새기는 것 보다는 '늘 도인 것'이라고 새기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액면으로 보면 별 차이는 없다. '늘 도'이기 때문이다. 단지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인데, 나는 앞의 세글자를 '도는 도가 될 수 있다'로 새기기 때문에 뒤의 세 글자를 '늘 도인 것은 아니다'로 새기는 것이다.
물론 좀 어색한 느낌도 있다. 나의 새김으로는 道可道와 非常道 사이에 문장을 끊어주거나 역접을 나타내는 글자가 붙었으면 전체 문장의 뜻이 더 분명했을 터인데 그렇질 않으니 그렇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든 불분명하고 모호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1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고려해서, 나는 첫문장을 이와 같이 새길 뿐이다. 그 이유는 다음 문장을 읽어가며 하나씩 풀어가겠다.
그 전에, 그래도 좀 찜찜한 감이 남아 있으니 글자 하나 하나를 벗어나서 첫 문장 전체의 구조를 한번 보자. 문제가 되는 道를 빼고 문장을 보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可○非常○
아리까리한 道를 빼고 보니 좀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같다. '~은 ~이 될 수 있는데, 아니다. 늘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가. 만약 옛날 비석이 발견됐는데 이와 같은 글이 써져 있고, 동그라미 부분이 깨어져서 판독이 안 되지만 자형으로 볼 때 같은 글자라고 판단 된다면 필경 저렇게 밖에 해석이 안 될 것이다. 저것을 만약 영어로 바꾼다면 '○ can be ○, not always ○' 정도가 될 텐데,(나는 뭐든지 어정쩡해서 영어문장이 어설플 수도 있다. 양해바란다.^ ^) 어쨌든 굳이 역접을 의미하는 말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문장 자체가 그닥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전체적인 조감까지 한번 해봤으니 첫 문장은 이쯤에서 접고 내 해석을 뒷받침하는 다른 문장을 찾아 진도를 계속 나가보겠다.
이어지는 두번째 문장은 재미나게도 첫문장과 똑같이 생겼는데 道 자리에 名이 들어간 名可名非常名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일단 道를 名이라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고, 형식적으로는 좀 더 부연설명을 하는 모양새인데다, 이후 이 名을 가지고 道라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양이 같으니 첫 문장과 똑같이 새겨야 하므로 그 뜻은 '이름은 이름될 수 있으나 늘 그 이름은 아니다.'라는 뜻이 된다. 도를 설명하는데 왜 이름으로써 비유를 할까. 그것은, 이름한다는 것이 도의 형태적 특성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은 실체가 아니다. 이름은 갖다붙이는 것이고 상징이다. 무엇에 어떤 이름을 갖다붙이면 그 불려진 바에 따라 새로운 의미와 쓰임새를 가지게 된다. 즉, 이름이 된다는 것은 이름 만큼의 제한이 되는 대신에 거기에 맞는 쓰임새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종래의 해석자들은 이름된 것은 그것의 본모습이 아니므로 부정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치부했다. 즉 실체만이 진실된 것이고 진정한 모습이고, 이름 불려진 것은 가짜이고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불완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보지 않는다. 실체는 실체 대로, 불려진 것은 불려진 대로 각각의 공능(功能)이 있을 뿐 그 어느 것에 가치의 우월을 논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이 내가 기존의 해석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실체를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인간의 오감은 각 감관에 가해진 자극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에 따라 거기에 가장 적합한 느낌으로 찍어내듯이 가공하여 전할 뿐인 것이다. 그러니 내가 본 것이 실체가 아니요, 내가 듣거나 만진 것도 사실은 실체와 다른 것이다. 인간은 감각이라는 필터를 거쳐서만 사물을 인지할 수 있으므로 감관을 거친 그 모든 자극은 사실은 모두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보게 된다. 감관의 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실제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인지의 세계는 실재한 것의 극히 일부분만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다른 가능성을 버려야 필요로 한 부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를 취하는 것은 아무 것도 취하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지된 것과 실재 사이에는 유용과 무용의 끊임 없는 변화의 관계가 있게 되는데, 어떤 경우이든 그것은 그때의 필요에 의할 뿐이지 가치의 높고 낮음을 따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지된 것이 실재한 것의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는 그 실재 전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감관으로 가공되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만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감관에 의해 인지된 것이 설사 일부이고, 이미지이고, 심지어 가짜라 하더라도 우리에겐 똑같이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장님과 앉은뱅이의 이야기를 알 것이다. 장님은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에 튼튼한 다리가 있고, 앉은뱅이는 걸을 수 없는 대신에 눈을 가지고 있다.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으면 둘은 훌륭한 동반자가 된다. 하지만 앉은뱅이의 눈과 장님의 다리는 따로 떼어서는 불완전할 뿐이기에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실체와 인지의 관계는 이와 같은 것이다. 실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인지에 의해서 현실 속에 쓰여지기 전에는 다만 존재 자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지 또한 실체의 무한가능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다만 하나의 작은 쓰임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를 통해 이와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싯구절이 표현하는 것이 노자가 말하려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몸짓을 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름됨이다. 또한 이름이 불려질 수 있는 것은 바로 몸짓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가 없는 것은 다 없는 것과 같다. 장님에게 앉은뱅이의 눈이 없거나 앉은뱅이에게 장님의 다리가 없는 것은 다만 무용(無用)일 뿐인 것이다.
노자는 두 가지의 가치를 똑같다고 이야기한다. 이름된 것의 실체와 이름 사이에 가치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은 이름될 수 있으나 그 이름에만 매몰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칠 경우 道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칸트의 명언을 잠시 인용하겠다.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용(用) 없는 체(體)는 공허할 뿐이고, 체(體) 없는 용(用)은 맹목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지되지 않은 존재는 공허할 뿐이고, 존재 없는 인지는 맹목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름불려지지 않은 꽃은 공허할 뿐이고, 꽃 없는 이름부름은 맹목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 둘을 전관해야 한다. 한쪽만 본다는 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한쪽만 아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이치란, 이 둘을 조화시킬 때 온전히 스스로 그러할(自然) 수 있는 것이다. 한쪽을 배제한 채 다른 한쪽만 가치가 있다고 우긴다면 결코 도답지 못하다. 공사현장에서 설계자는 현장소장이 건축의 기본을 모른다고 경멸하고, 현장소장은 설계자에게 건축의 현실을 모른다고 경멸한다면 온전한 건물이 나올 리 없다. 삽 없는 설계도는 공허한 것이고 설계도 없는 삽질은 맹목적인 것이다.
최근 뇌 없는 삽질 전문가가 단군이래 유래가 없는 대토목공사를 일으켜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한다. 사고력은 없고 떡밥만 있다. 죽일놈의 떡밥. 삽질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왜 그래야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전형적인 인지부조화의 사례에 해당된다. 잘못된 줄 알면 안 하면 된다.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면 대략난감일 뿐이고. 필시 그 삽질 전문가는 그냥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고싶은 것일 테다.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리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뇌가 없이 행동하면 이와 같이 된다.(햄스터가 뇌가 없단 얘기가 아니다. 본능으로 행동할 뿐 생각하는 법을 모른다는 뜻이다.) 글은 배웠으되 말을 배우지 못한 자가 쓴 글처럼 어지럽고, 걷는 것은 배웠는데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자의 걸음걸이 처럼 우왕좌왕인 것이다. 글을 배울 때는 생각하는 법도 같이 배울 것이고, 걷는 걸 배울 때는 길도 같이 배울 것이다.
아무튼, 이로움만 아는 것도 곤란한 것이요, 본질만 붙잡고 있는 것도 곤란한 것이다. 이 두가지를 유연하게 꿰뚫고 그때 그때 알맞게 적용시킬 줄 아는 것이 도(道)라고 노자는 말하는 것이다. 좀 무리한 해석의 비약이 아닌가 싶을 수 있다. 다음 글월을 보자.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無名)과 유명(有名), 천지(天地)와 만물(萬物), 시(始)와 모(母)가 정확하게 대비되고 있는데, 그 어느 것이 더 우월하고 어느 것이 종속된다고 볼 수 없다. 무명이 유명에 대해 가치적으로 우월하지 않으며, 천지/만물, 시/모 또한 동일하다. 자세히 들여다 보자.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고 유명은 만물의 어미라고 했다. 천지는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이고 존재를 뜻하니 곧 '시작'을 일컫는 것이다. 만물은 변화이고 쓰임이다. 그러니 오만 것이 거기서 나오는 '어미'라는 것이다. 어미의 메타포는 생산을 뜻하는 것이다. 변화와 생산은 곧 용(用)이다. 그리고 그 용이란 바로 '본질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본질은 용(用) 없이는 가치를 지닐 수 없는 것이고 용(用) 또한 본질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동등한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상보적(相補的)인 이 관계가 바로 무명(無名, 이름되지 않음)과 유명(有名, 이름됨)의 관계라는 것이다.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앞의 글이 무명과 유명의 개략적인 개념에 대해 설(說)한 것이라면 이 글월은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을 형용하고 있다. 무명과 유명이 무엇이냐, 어떻다는 것이냐? 바로, 무욕하면 묘(妙)를 보고, 유욕하면 요(徼)를 본다는 것이다. 바라는 바, 목적하는 바가 없으면 그 오묘함을 볼 것이고, 바라는 바, 목적하는 바가 있다면 그 쓰임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묘는 보이지 않는 것, 함장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구획되거나 확정되지 않은 것을 뜻한다. 요는 드러난 것, 쓰임새가 확정되어 현실적 효용이 있어진 것을 뜻한다. 그윽한 눈으로 무심히 바라보면 그 대상 자체의 무한함 즉 오묘함을 볼 것이요, 뭔가 바라는 것이 있어 쓰임을 찾는다면 그 뜻한 바를 얻게 될 것이란 것이다.
此兩者同出而異名
우리는 흔히 드러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대개 거기서 가치가 생겨나오기 때문이다.(有名萬物之母) 또 어떤 이는 본질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드러난 것, 이미 쓰임이 생긴 것은 가짜라고. 그 너머에 있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본질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無名天地之始) 하지만 이 둘은 같은 것이다(此兩者同). 욕(欲)에 따라 나눠진 것일 뿐인 것이다. 이 문장이 바로 그것을 얘기하고 있다. 또한 바로 이 문장 때문에 앞에 말한 것처럼 나는 첫 문장을 그와 같이 해석한 것이다. 도를 도라고 한 것은 유명(有名)이다. 그것은 유용하다. 하지만 무명(無名) 또한 똑같이 유용한 것이기에, 도를 도라고만 해서 거기에 매몰되지 말라는 것이다. 도는 도이고 또 다른 무엇이기도 한 것이다. 이름은 이름이고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둘은 똑같은 것을(此兩者同) 달리 말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出而異名)
여기 나무 막대기가 있다고 하자. 나무로 된 길다란 어떤 것이다. 이것은 욕(欲)이 개입하지 않았을 땐 나무로 된 길다란 어떤 것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것은 아직 아무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만한 존재이다. 만약 학교 선생님이 이것을 본다면 교편으로써의 쓰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교편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가지게 된다. 욕(欲)에 따라 용(用)이 생기게 된 것이고, 대신에 교편 이외의 다른 가능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교편으로서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나이 많은 노인이 본다면 이것은 지팡이가 될 것이고, 밥짓는 아낙이 본다면 아궁이의 부지깽이가 될 것이고, 어린 아이가 본다면 장난감 칼이 될 것이다.
교편이 되든, 지팡이가 되든, 부지깽이가 되든, 장난감 칼이 되든 그 욕(欲)함에 따라 용(用)이 달라질 뿐, 나무 막대기의 존재 자체는 변함이 없다. 교편이 되었다고 해서 교편이기만 한 것은 아니요, 부지깽이가 되었다고 해서 부지깽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팡이라고 하면 지팡이가 될 수 있으나 늘 지팡이인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이 도의 모습이다. 그것을 볼 줄 아는 것이 도답다는 것이다. 내가 회사에 출근하면 김과장이고, 조기축구회에 가면 축구를 좋아하는 한 동호인이고, 친구들을 만나면 주접떠는 주접이고, 집에 들어가면 한 아이의 다정한 아빠가 된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다 나의 모습일 뿐이다. 집에 와서 김과장이 되려하면 그것이 바로 도답지 못한 것이다. 회사에서는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집에 와서는 자식들에게 아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도의 모습이다. 김과장으로서의 역할에만 몰두하거나, 아빠로서의 역할에만 몰두하거나, 이것 저것 다 버리고 자기 자신을 찾는답시고 깊은 산중에 칩거하여 도를 닦는 것은 모두 도답지 못한 것이다. 어느 한쪽에 매몰되어서 유연함을 잃는다면 도답지 못할 뿐 아니라 '스스로 그러함'을 잃은 것이다.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은 경직된 것이다. 그렇게 고정된 것은 도와 거리가 멀다.
도는 유연한 것이고 경계가 없이 흐르는 것이다. 끊임 없이 변하며 새로워지는 것이다. 써도 써도 마르지 않으며 낡아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정하고, 고정하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유연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오직 죽은 것만이 뻣뻣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언제든 놓을 수 있어야 다시 집을 수 있다. 버려야 얻을 수 있다. 욕심이 많은 것은 도답지 못한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과자를 하나 주면 한손에 받아들고 좋아한다. 다시 사탕을 하나 주면 다른 손에 받아들고 좋아한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맛나게 보이는 빵을 주면 아이는 혼란스러워하다가 그냥 울고만다. 욕심만 있지 해결할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놓으면 된다. 버리면 된다. 잡기 위해서는 먼저 놓아야 하고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먹을 것을 양손에 쥔 어린 아이보다 더 현명한가. 혹시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잔뜩 움켜쥐고 마냥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욕망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욕(欲)한다는 것은 곧 다른 것을 버림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치를 알지 못하면 도를 잃고 끊임 없이 엄한 길을 헤메게 될 것이다.
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그 같음을 이르기를 玄하다고 하니, 현하고 또 현한 것이 뭇 오묘함의 문이구나."하는 말로 1장이 끝나고 있다. 이름된 것과 이름되지 않은 것 즉, 쓰임새가 생긴 것과 아직 가능성만 있는 것, 이 둘이 원래 같은 것이고, 그 같음을 현(玄)하다고 표현했다. 현하다는 것이 딱히 다른 말로 새기기 힘든데,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또 심오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한눈에 딱 보이는 빤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도무지 그 깊이를 알기 힘든 현묘한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도올 선생은 '가믈타'고 번역했는데, 탁월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따라하기도 그렇고 해서, 나는 '거뭇하다'로 표현했다.
도는 쉬운 것이지만 빤히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수없이 하고 또 하고, 가고 또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 하다보면 불현듯 내 몸에 붙어 흐르는 것, 그것이 내 몸의 길, 도(道)인 것이다. 즉, 실재(實在)하지만 실체(實體)로 인지할 수는 없는 것이 도다. 그것을 '거뭇하다'고 한 것이다. 무지개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지만 무지개를 잡을 수는 없다. 무지개 속에 들어가 있으면 오히려 무지개를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도 또한 쉽게 알 수 있고 분명 존재하는 것이지만 한마디로 형용하거나 그 실체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바르게 깨닫고 끊임 없이 실천하는 중에 알게 되고 얻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모든 오묘함의 문이니, 거기로 통하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가닿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1장 끝.
노자 도덕경 왕필주 (老子道德經王弼注)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可道之道,可名之名,指事造形,非其常也。故不可道,不可名也。
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
凡有皆始於無,故「未形」、「無名」之時則為萬物之始,及其「有形」、「有名」之時,則長之育之,亭之毒之,為其母也。言道以無形無名始成萬物,以始以成 而不知其所以玄之又玄也。
故常無欲,以觀其妙;
妙者,微之極也。萬物始於微而後成,始於無而後生。故常無欲空虛,可以觀其始物之妙。
常有欲,以觀其徼。
徼,歸終也。凡有之為利,必以無為用。欲之所本,適道而後濟。故常有欲,可以觀其終物之徼也。
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眾妙之門。
兩者,始與母也。同出者,同出於玄也。異名,所施不可同也。在首則謂之始,在終則謂之母。玄者,冥也,默然無有也。始母之所出也,不可得而名,故不可言, 同名曰玄,而言謂之玄者,取於不可得而謂之然也。謂之然則不可以定乎一玄而已,則是名則失之遠矣。故曰,玄之又玄也。眾妙皆從同而出,故曰眾妙之門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