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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옥세설(褐玉世說)

나를 전율시킨 치명적 마력, 임재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나는 가수다'가 재개되었다. 불행히도 나는 본방을 사수하지 못하고 지난주도 그렇고 이번주도 그렇고, 발달된 통신기술의 힘을 빌어 뒤늦게 보게 되었다.

TV 쇼프로를 애써 찾아서 보는 경우가 극히 드문 내가 이렇게 열심히 챙겨 보는 것은 그만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들이는 공력과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5월부터 방송되기 시작한 '나는 가수다'는 임재범의 존재감으로 인해 '꼭 봐야 하는 프로그램'으로 격상되었다. 대부분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까지의 어른들이 나와서 애들같은 유치한 장난을 해대는 외박 프로그램은 이제 안 봐도 되는 것이다.

'나는 가수다'의 미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사실 여전히 결정적 결점이 해결되었다고 보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도 제일 첫번째로 꼽으로 수 있는 것은 역시 실력있는 가수들의 진지한 무대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MR을 깔고 부르거나 심지어 립싱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수의 진짜 매력을 알기란 어렵다.(춤과 퍼포먼스를 주요 경쟁력으로 삼고 있는 비주얼 위주의 댄스가수들은 예외)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들이, 자신이 원하는 세션을 대동하고, 방송국에서 제공해줄 수 있는 최고수준의 음향장비를 배경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는 매우 드물다. 개별로 진행하는 자신의 콘서트와 같은 공연무대를 별도로 한다면, 최고의 환경을 제공받은 상태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또 그것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관객 및 시청자들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가수들에게도 매우 좋은 조건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가수다'는 이 지점에서는 확실히 성공적인 멍석을 깔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현재 출연하고 있는 7명의 가수들은 매우 높은 수준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시청자 입장에선 마냥 즐거울 따름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임재범의 무대는 나에게는 경악스럽다고 밖에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지난주 있었던 첫 번째 무대를 보고, 나에게 들었던 생각은 '졌다..' 였다. "노래를 어떻게 저렇게 멋있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저 목소리는.. 아.. 졌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실 절망감을 느꼈다. 나도 한노래 한다고 자부하고 살아온(?) 넘인데, 이건 뭐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노래 좀 한다는 인간들을 절망시키는 목소리였다. 그 뿐인가, 저 절창은..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뿜어내는 저 아우라는 그냥 한방에 뻑가게 만든다. 진짜 진심으로, '아.. 멋있다..' 하고 생각했다. 왠만한 세상 일에는 심드렁하기 마련인 40먹은 남자에게 '멋있다'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일은 좀체 힘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꼼짝없이 '멋있다..' 하고 넋을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너를 위해'는 굉장히 많이 듣고 또 나도 노래방에서 가끔 부르곤 하는 것인데, 아... 씨팔.. 저렇게 멋있게 부르다니.. 졌다 졌어. 아무리 자기 노래지만, 척 하고 나와서 쓰윽 부르는 것이 저렇게 멋있게 뽑아져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마치 "내가 바로 그 임재범이다" 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재범이 형, 당신 좀 짱인듯.)

하지만, 그건 맛뵈기에 불과했다...



어제 방송에서, 임재범은 남진의 '빈 잔'을 불렀다. "나..남진의 빈 잔?..." 난데없는 시추에이션에 난 임재범이 과연 어떻게 빈잔을 부를지 몹시 기대되었다. 그리고 몹시 궁금했다. '도대체 저 노래를 가지고 어떻게 실력을 보여주고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임재범이라 해도..' 나의 생각은 딱 그것이었다.

젠장... 노래 듣다가 울 뻔했다. 뭔가가 컥..하고 받쳐올라와서 잠시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이건 뭐, 완전히 압도당했다. 전율스러웠다. 이런 전율을 느낀게 얼마만인지..

도대체 어떻게 '빈 잔'을 이렇게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원곡의 가사내용이 무색하게, 완벽히 자신의 분위기로 휘몰아가서는 보는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무대였다. 주먹으로 두드려대는 큰북과,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여자 코러스를 배경으로 그의 목소리는 마력을 뿜어내었다. 주술적인 분위기의 도입부에서부터 심장을 조여오더니, 한 소절 돌고 클라이막스로 치달으면서 거칠게 폭발하며 무대를 장악하는 모습은 진짜 압권이었다.

그리고 목소리.. 나를 절망케 하는 저 목소리.. 단 하루만이라도 저런 목소리를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론 노력도 있겠지만, 최고 수준의 가수란 역시 목청을 타고나야 하는 것이다. 뭘 부르든 일단 첫마디 나오는 음색에서 '그냥 보내버리는' 저런 타고난 자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농담을 해도 노래처럼 들릴 저 매력적인 목청은... 정말 절망적이다...ㅜ.ㅜ

술을 한잔 걸친 탓도 있지만, 나는 숨이 꺽.. 막히는 것 같았다. 인간의 목소리로서 이렇게 타인을 완벽히 제압하다니, 그냥 대단한 카리스마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개인적으로 락음악을 좋아하는 취향이라 더욱 그러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노래를 듣고 위압감을 느꼈다. 모름지기 무대 위의 가수란 그 순간 만큼은 청중을 압도하는 그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난 믿는다. 비록 화면으로였지만 난 진짜 뻑 가고 말았다.

전달하는 내용이 없으면 말을 하는게 아니라 입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뜻을 알지 못하고 적는 글은 글을 적는 것이 아니라 글을 그리는 것이다. 느낌을 전해주지 못하는 노래는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소리를 지르는 것일 뿐이다. 임재범은 가수가 노래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해줬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황에서도 그는 전율적인 무대를 선보였다.(실제로 자신의 노래를 끝낸 직후 병원으로 향해 이후 임재범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진짜 노래꾼의 내공을 유감없이 드러낸 한판이었다.

물론 다른 가수들도 다 훌륭했지만 임재범의 존재감은 그 중에서도 발군이었다. 안 그래도 탁월한 보컬리스트인데, 하루 3시간 이상 자지 않을만큼 스스로를 다그쳐 뿜어내는 그 내공은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남진의 '빈 잔'을 이보다 더한 충격과 전율로서 노래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단지 노래를 잘 하는 것과 관객들에게 노래로써 감동을 전해주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나는 가수다' 무대는 보여주고 있다. 처음 내 예상과는 달리, 오락적 재미 없이도 노래만으로도 예능프로그램이 충분히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오락적 재미를 위해 투입된 개그맨 매니저들의 역할이 뻘쭘해졌다. 역할 변경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진짜로 매니저 노릇을 하든지..^ ^

다음주가 기대된다. 토요일, 로또가 당첨되지 않아도 그 다음날 또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나른한 일상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또 어떤 멋진 무대를 보여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