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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야기

이종범이 진짜로 잘못한 것은..



이종범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야구선수 중 한명이다. 나 좀 까다로운 사람이다. 왠만하면 인정 잘 안 한다. 내가 인정하는 기준은 단순히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이 시간의 검증을 거쳐 그 결과를 보여줄 때이다. 30년 프로야구 역사에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 선수는 많지 않았다. 예를 들면 김용수, 양준혁들이다.

이종범도 당연히 그 범주에 든다. 아니, 들 수밖에 없다. 명실공히 이종범은 천재일 뿐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유니폼을 벗으면 그의 백넘버는 구단에 의해 영구결번으로 지정될 것이 확실하고 기아팬 뿐아니라 모든 야구팬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이종범이 구설에 올랐다. 좀 드문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종범이라 더 아쉬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장면을 중계로 지켜봤는데,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팽팽한 투수전으로 진행된 경기였다. 몇 개의 결정적 에러 탓에 홈구장에서 3대2로 뒤진 9회말 SK의 마지막 공격때였다. 첫타석에 대타로 나온 박정권이 외야 펜스를 직접 때리는 대형 타구를 날렸다. 경기장이 일제히 함성으로 뒤덮혔다. 당연히 2루타였다. 게다가 무사 상황이니 거의 동점 또는 역전 상황으로 가져갈 수 있는 큰 타구였다.

그런데 그때 우익수 이종범이 노련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당연히 2루타가 됐어야 할 타구를 멋진 펜스플레이를 통해 단타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정말 깔끔한 플레이였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태리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수비였다. 짬밥은 그냥 먹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2루와 1루는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닌가. 결과적으로 보면 이종범의 이 플레이 하나가 결국은 게임을 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훈갑 플레이였고, 나는 '오늘의 플레이(play of the game)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멋드러진 수비의 순간에 오물 투척이 벌어졌다. 맥주캔이었다. 이종범이 공을 잡아서 송구를 하는데 영향을 미치진 않았지만 분명히 위협이 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SK팬이 이종범을 노리고 던진 것일 터다. 이종범은 팽팽한 투수전이 펼쳐지고 있던 5회에 솔로 홈런을 터뜨려 기아가 앞서나가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바 있었다. 아마도 그런저런 악감정이 동반한 SK팬의 행동인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그 상황에서 이종범이 그 맥주캔 투척팬과 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종범은 매우 격앙된 듯이 보였다. 관중을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글러브를 벗어 던지려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이종범의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빈캔이 아닌 온캔이라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당연히 기분 나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렇게 팬과 싸우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화면에 자세히 잡히지 않았고 말하는 내용이 들리지 않으니 정확한 상황을 알수는 없으나 이종범의 대응은 어쨌든 다소 과한 면이 있었다. 맥주캔 투척으로 플레이가 방해를 받은 것도 아니고(3~4m 옆으로 떨어졌다) 기아가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굳이 흥분할 필요가 없었다. 기분이 나쁠 수는 있겠으되 상황을 그렇게 몰아갈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혈기방장한 젊은 선수도 아니고 이종범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선수라면 더더욱 그렇다.

캔투척 때문이 아니라 현장에서 무슨 욕을 한 것인지 어쩐지 나는 알 수 없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패배를 코앞에 둔 홈팀 팬의 지나친 감정표출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팬과 싸움을 해봐야 결국 선수가 손해라는 것을 이종범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순간의 분함을 참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종범 선수를 매우 좋아하지만 이번 사건은 명백히 이종범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보고있다. 왠만한 경우에는 선수가 참아야 한다. 만약 그 순간 이종범이 참고 분을 삭였다면 팬들은 당연히 그 주취난동 관중을 나무랄 것이다.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것이고, 만약 그걸로 인해 경기의 결과가 달라졌거나 선수가 상해를 입었다면 법적인 처벌까지 감수해야 할 위험한 행위였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선수 스스로가 격하게 감정 표출을 하면서 팬들은 상황을 냉정하게 볼 수밖에 없어졌다. 투척관중은 당연히 잘못한 것이지만 선수에 대해서도 결코 좋게 보아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선수는 구장 안에서는 플레이어야만 하지 팬들과 1대1의 인격으로 존재하는 것을 팬은 원하지 않는다. 결과의 심판 마저도 팬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의 몫을 팬들에게 돌려줬을 때 팬들이 선수를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이지 스스로 결정을 내린 뒤 팬들에게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팬이 아무런 권한이 없어졌기 때문에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고 결국 냉정하게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으면 일단 당사자를 경찰에 끌고가서 법적인 심판을 받게해야 한다. 그러면 법은 해당 행위에 대해 법이 정한 바에 따라 처벌을 하게 된다. 그런데 현장에서 바로 맞받아쳐서 맞싸움을 벌였다면 법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아무런 죄없이 선빵을 당한 피해자의 사정따윈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이미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정상참작을 해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폭행사건에 대해 쌍방과실을 매길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맞은 사람이 이종범이고 때린 사람이 캔투척 관중이고 법이 팬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종범은 팬들이 판결해줄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종범이 잘못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판결(?)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을 스스로 걷어차버린 것이다. 순간의 분을 참지 못한 것이다. 현장에서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현장에서 캔투척팬이 이종범에게 뭐라고 모욕을 줬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런 부분은 어차피 선수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야구 하루이틀 하는거 아니지 않는가.

야구선수도 사람으로서 인격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야구장에서 인정받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선수는 그라운드 위에 서는 순간 이미 광대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가수든 배우든 스포츠인이든 다 마찬가지다. 결국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랑을 받아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무대에서는 스스로의 인격을 버릴 필요가 있다. 오로지 관객의, 관중의 즐거움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인기가 있는 연예인은, 운동선수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고 인기라는 것을 얻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관중이 이대호에게 "야이 뚱땡아, 1루까지 뛰면 숨 안차냐?" 하고 욕을 해도 "1루까지는 숨 안찹니다. 홈런치고 홈까지 가면 숨차요." 하고 위트로 받아넘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대 위에 선 자의 역할이고 숙명이다. 어떤 경우에도 무대 위의 광대는 관객의, 관중의 여흥을 깨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 상황이 수습되고 난 뒤에 잘잘못은 가리는 것이다. 제3자에 의해.

물론 관객이라고 해서, 관중이라고 해서 모두 다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무대 위의 배우가 또는 선수가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하면 안된다. 가수가 노래부르는 것을 방해하면 안되고 선수가 플레이하는 것을 못하게 방해하면 안된다. 그것은 그 가수에게 혹은 선수에게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지켜보는 다른 관객에게, 관중에게 잘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의 혹은 관중의 비난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니 무대 위의 가수는, 그라운드 위의 선수는 가만히 그 상황을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역할이다.

억울하고 안 하고는 관객이, 관중이, 팬이 가려준다. 그러니 자신을 지지하고 사랑하는 팬에게 역할을 맡기면 된다. 그들의 뒤에는 팬이 있지 않은가. 그 순간만 참으면 이종범을 사랑하는 팬이 그 볼썽사나운 캔투척 관중을 엄중하게 야단칠 것이다. 아마 평생 들어도 못들을 욕을 전국의 야구팬에게 먹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것이다. 이종범이 잘못한 것은 그것이다. 팬들의 역할을 뺏은 것이다. 이종범 정도 되는 선수는 그것을 알아야 하는데 좀 아쉽다.

야구가 직업이고 생활이라고 느끼는 순간 야구선수는 망한다. 노래가 직업이고 생계수단이라고 느끼는 순간 노래에 기름이 끼고 영혼은 빠져나간다. 가수가 망하는 것이다. 무대 위에 서는 그 순간이 얼마나 보람되고 영광스런 순간인가를 잊는 순간 광대는 매너리즘이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무명가수가 공중파 무대에 처음 서는 순간, 2군 선수가 1군 그라운드에 처음 서는 순간의 희열을 잊으면 안된다. 사람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자들의 숙명이다.

이종범 선수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실수를 한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순간의 분함, 억울함을 참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종범 정도의 대스타라면 좀더 성숙한 대응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팬으로는 나는 생각한다. 공을 던지고 공을 치는 것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게 다라면 기계 갖다놓고 하면 된다. 우리가 선수들에게 바라는 것은 드라마이고 감동이다. 그 감동과 드라마의 한판을 위해 선수는 개인의 인격일랑 잠시 내려놔 둬도 괜찮은 것이다. 그러면 그 몇 배의 아니 몇천 몇만배의 사랑으로 되돌려 받을 것이다.

자신의 뒤에, 팬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다는 것을 한 순간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다음 메인에 걸리는 바람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됐군요.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는 사안이라 논쟁의 한가운데 서게 된 것 같습니다.
욕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욕하는 것도 뭐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기분은 별로 좋지 않지만.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서 문장을 좀 부드럽게 바꿀까 하다가 그러면 먼저 댓글 단 분들이 표현해 놓은 것이 뻘쭘해질 것같고 어차피 원문의 모습 자체가 논란이라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그대로 그냥 둡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아서 덧붙입니다.

다른 것은 오해를 하든 오독을 하든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내가 이종범 선수를 싫어하면서 좋아한다고 비꼬는 듯이 교묘하게 글을 써놓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글이 좀 거칠어서, 혹은 내용이 다소 건조해서 그 부분이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종범 선수는 내가 좋아하는 선수입니다. 본문에도 있지만, 세월을 통해서 기량과 야구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를 검증 받은 선수들, 김용수, 송진우, 양준혁, 장종훈, 이종범 선수 등은 내가 인정하고 매우 좋아하는 선수들입니다.

바로 직전에 쓴 글에서 이종범의 은퇴시기를 논한 것은 너무 좋아하는 선수라서 아름다운 은퇴의 타이밍을 놓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이고, 재작년 기아 우승 당시 쓴 글에서는 이종범 때문에 감동스러웠던 한국시리즈 관전기에 대한 글을 쓴 바 있습니다. 굳이 의심이 간다면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래 논쟁적인 인간이라, 욕하고 까고 하는 것에는 아무렇지 않습니다만, 이종범 선수에 대한 오해의 시선은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나는 그날 그 플레이에 대한 것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선수라도 잘한 것을 잘했다 하고 못한 것은 못했다 하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오해 없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