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가 애플 CEO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한다. 내부 사정이야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건강상태가 회복되지 않는 수준인 듯하다. 일찍이 예상되어 왔던 일이기는 하지만 조금 아쉽고, 조금 안타깝고,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뭐 그렇다.
내가 애플 주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애플에 뭐 하나 연줄이 닿아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찌됐든 아마도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했던 삶을 살았던 한 인간의 퇴장을 보는 감상은 왠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것이다. 누구라도, 삶이 꺾이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세상을 얻을 순 있지만 가져갈 순 없고, 혼자 떠나야 한다. 무대가 화려할수록 내려오는 발길은 쓸쓸하기만 하다.
나도 한때 잡스 덕분에 먹고 살았다. 그래서 더 스산한 감정이 드는 것인지.. 어찌됐든, 이 잡스란 문제적 인간.. 참으로 희귀한 캐릭터를 인류역사에 아로새긴 것은 분명하다. 삶 자체가 한편의 영화와 같다고 할까.. 이렇게 다이나믹하게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면서 종국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삶을 산 인간은 과거에는 몰라도 현세에는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동갑내기이면서 동종업계의 라이벌로 오랜시간 자의반 타의반 비교당하면서 인구에 회자되었던 빌 게이츠와 비교해 보더라도 이 스티브 잡스란 캐릭터는 굉장히 영화적인 캐릭터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별다른 평지풍파 없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빌 게이츠에 비해, 탄생부터 부적절했던(사생아 출신) 잡스는 맨손으로 기업을 일으켜 20대 초반의 나이에 세계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억만장자가 되었다가, 자신이 고용한 전문경영인에게 배신당해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리고 애플이 존폐의 기로에 선 그 마지막 상황에 다시 전문경영인으로 컴백해서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마치 영화와도 같은 극적인 대반전을 이루고야 말았던 것이다.
불과 십수년만에 애플은 망하기 일보직전의 기업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다. 액슨모빌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시장가치를 지닌 기업이 되었다는 기사를 봤을 때, 나는 참 기분이 묘했다. 기적을 현장에서 목도하면 아마도 그런 기분일까.. 아이팟 이후로 승승장구하던 애플만 아는 사람은 아마 느끼지 못할 묘한 감회가 있었다. 회사의 생사를 걱정하며, 숙명의 라이벌 MS에서 영혼을 판 대가로(당시 OS문제로 소송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돈을 꿔와서 겨우 목숨을 연명했던 너절한 애플이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고, 사고싶어서 줄을 서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업이 되는 시절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엇이 이런 기적을 가능케 했는가.. 역시 스티브 잡스라는 희대의 몽상가가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꿈꾸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구현한 인물로서 현시대의 인물 중 스티브 잡스만큼 그것을 극명하게 증명하는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삼성이나 LG가 애플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꿈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가업 경영자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창조적 추진력이 바로 오늘의 애플을 있게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양떼 중에 가장 똑똑한 양과, 양떼를 이끄는 양치기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벽이 있다. 양떼 중에 가장 앞서가는 양일지라도 결국 양치기가 깃발을 꽂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잘난 양이라도 양은 양밖에 못보지만 양치기는 들판과 계곡과 풀과 날씨를 두루두루 살피고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고독한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때로는 나락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결국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땅으로 이끄는 위대한 결정이 되는 것이다.
따라쟁이 LG가 삼성을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삼성이 애플을 이길 수 없는 이유와 대동소이하다. 목없는 20세기 늙은이의 눈치를 보는 대한민국 최고의 두뇌집단도 결국 삼성이라는 울타리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시키는 것을 잘하는, 잘 다듬어지고 조직화된 똑똑한 인재들에게서는 '좀더 나은 것'은 나올 수 있을지 몰라도 '창조적 혁신'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란 '깜짝 놀랄 새로운 것'이 아니라 '별로 나쁘지 않은 것' 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옴니아와 아이폰의 차이였고 갤럭시탭과 아이패드의 차이이다.
다시 잡스로 돌아가서, 이제 다시는 잡스가 인류문명에 기여할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잡스가 세상사람들에게 한 마지막 선물은 아이패드2가 될 공산이 높아졌다. 철저하게 고독했고, 지독히도 자신만의 신념을 고집했던 또라이는 이제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던 그 언변과,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그 기막히고 매력적인 물건은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유산은 면면히 이어지겠지만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이제 전설로만 기억될 것이다.
전설적인 인물과 동시대를 살아서 즐거웠다. 많은 사람을 욕망하게 하고 꿈꾸게 만든 것은 오로지 그의 업적이었다. 돈을 버는 기업을 이끄는 것이 때로는 매우 멋지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모든 사람들의 책상 위에 컴퓨터가 놓이는 세상을 꿈꾸고,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하얀 이어폰을 꽂게 만들고, 휴대폰이 단지 전화만 하는 투박한 기계가 아니라 걸어다니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합한 매력적인 전자기기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에게 감사한다.
아니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있어 꿈꾸는 것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인류문명에 기여한 가장 큰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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