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하고 있던 일이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쓸쓸함과 아쉬움과 안타까움 등등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데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전략가이자 또한 자신이 마음 속으로 그린 것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데 천부적 자질을 타고난 희대의 몽상가. 그는 이 시대의 매우 매력적인 천재 중 한명이었다.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린 천재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는 후다닥 모든 것을 보여주고 홀연히 떠나갔다. 주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 그 괴벽과 굴곡진 인생 그리고 도저히 떨쳐버리기 힘든 마력의 물건들.. 그는 여느 모로 보나 한편의 드라마틱한 영화와 같은 삶의 족적을 남기고 훌훌 이 바닥을 뜬 것이다.
전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므로, 그의 삶의 궤적도 전설로 남을지 모를 일이다. 어떻게 보든 그의 삶은 드라마틱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니까. 사생아로 태어나 스무살 새파란 나이에 세상을 한번 뒤집었다가, 서른에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 낭인이 되고, 다시 복귀해서는 다 망해가던 회사를 시가총액 1위의 세계최대기업으로 만들어낸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이었다. 그 어느 하나 평범하지 않았지만, 아직 한참 나이에 췌장암으로 그 드라마틱한 삶에 마지막 방점을 찍기까지, 그의 삶은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삶이었다.
밋밋하다 못해, 심심해서 죽을 것같은 나의 삶의 여정과 비교해보자면 동시대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격차가 있다. 뭐 그렇다고 부럽거나 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 있기 마련이니까, 뭐 그런 차원에서 참으로 흥미로운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뭘까 하고 괜한 자책이 살짝 끼어들면서..
예전에, 제법 심취한 애플교 신자였지만 지금은 그 흔한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무늬만 애플빠인 내게도 잡스의 귀천은 제법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가 애플CEO 자리를 물러날 때, 아이패드2가 그가 인류에게 남겨준 마지막 선물일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엔딩크레딧을 올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서 뒤얽혔었다. 그것은 아마도 옛사랑에 대한 미련이었는지.. 헤어진 현실과 휴대폰에서 전화번호를 지우는 것이 동시에 되지 않는 짠한 마음 같은 것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는 참으로 희한한 것을 많이 보여주었다. 컴퓨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복잡하고 어려운 명령어들을 외워서 타이핑하지 않고도 쥐새끼를 움직여서 화면상에 뿌려진 그래픽 이미지로 실제 현실과 같은 동작을 통해 컴퓨터를 작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셀애니메이션이 아닌 컴퓨터로 만들어낸 이미지로 실사영화 같은 실감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MP3플레이어를 쓰는 새로운 방법을, 휴대폰을 쓰는 새로운 방법을, 컴퓨터를 들고 다니며 놀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 어느 것도 그가 최초로 발명해서 내 놓은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것의 창조자가 되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그는 해버린 것이다. 머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머리를 쓰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누구나 하지만 모두가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느끼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0.000000001%의 특별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누가 먼저 생각했느냐 하는 것은 학자들에게나 유용한 덕목이다.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유니크한 아이템을 발굴해내는 데는 잡스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별볼일 없어 보이는 물건 혹은 기술을 세상을 바꾸는 매력적인 물건이나 기술로 포장해내는 데는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기업가로서의 창조력은 그와 같은 것이다. 만약 잡스가 전자에 해당했다면 HP나 IBM의 연구실 한구석에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잡스는 포장의 달인이었다. 자신이 머리 속으로 그리고 있는 것들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추진력과 현란한 언변 그리고 미학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어느 것이라도 부족했다면 매킨토시, 픽사의 애니메이션,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그 어떤 것도 매력적인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잡스의 마법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그저 그런 것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니까. 하고 한 컴퓨터 중의 하나, 많고 많은 MP3플레이어, 휴대폰, 노트북컴퓨터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예컨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도록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 한 눈에 빠져들게 만드는 디자인 감각, 사람들의 마음을 쏙 빼놓는 사용편의성과 같은 것들에 대한 그의 직관이, 그와 그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구분 짓게 만드는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그것들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추진력과 그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잡다한 어려움들을 극복하게 만드는 뛰어난 언변이 있었다. 그것이 그런 획기적인 물건들을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삼성이나 LG의 개발인력들이 애플의 제품보다 훨씬 뛰어나고 독창적인 제품을 기획할 수 있지만 결국 제품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할 역량과 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전직 LG연구원의 퇴사의 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의 조직환경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혁신을 하지 않고 혁신을 '요구'하는 것 말이다. 누가 혁신을 해야 하는 것인지.. 자리를 깔아 주고 춤추라고 해야지, 손발 묶어 놓고 춤추라니..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니 그게 사실은 더 문제다.
잡스 얘기하다 왜 또 어느 나라 얘기가 나오는지.. 쩝, 암튼 잡스는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그 어떤 다른 최고경영자와도 달랐던 독특한 인물, 좀체 미워하기 힘든 묘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와 일했던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대중의 눈높이에서는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인 것이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신제품 발표장에서 허름한 청바지 주머니로부터 그가 요상한 물건을 척 꺼내들 때, 그것은 이상하게 좋아 보이는 것이다. 그런 것을 마력이라고 해야 할까. 잡스가 만들어내는 물건과 잡스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만큼 그는 대중들에게 자기자신을 그 물건들에 감정이입을 시키는 마술을 부려왔다. 그리하여 이상한 프리미엄이 붙게 만들곤 했다. 왠지 달라 보이는 그 더러운(-.-) 느낌.. 차가운 전자제품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게 만드는 것은 매킨토시 이래로 근 30여년간 그가 사람들을 홀려 온 마법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를 떠나 보내야 한다. 그도 한번 태어났으니 별 수 없이 죽어야 하는 똑같은 인간인 것이다. 기이하고 매력적인 인물과 한 시절을 보내서 즐거웠다. 내 돈 주고 샀는데 이상하게 감사한 느낌을 주는 물건을 만들어 내던 그 괴물과 이제 안녕을 고해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최첨단 전자제품 사용자들을 사이비종교 신도처럼 자신이 만든 제품을 추앙하게 만들었던 인물, 불만이 가득한데도 왠지 불만을 표출하고 싶지 않은 희한한 전자제품을 만들던 인물, 전자제품을 만들거나 기업을 운영하는 것같은 재미없어 보이는 일을 굉장히 매력있고 재밌을 것처럼 보이게 만든 그가 바로 스티브 잡스다.
벌써 그가 그립다.
마지막으로, 내가 잡스에 관해 들은 에피소드 중에 십수년 지나도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가지.. 말빨도 이 정도로 세울 수 있다면 그 누가 넘어가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애플Ⅱ가 대박이 나고 애플사가 욱일승천하던 시절 잡스는 좀더 체계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전문경영인을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대상은 당시 펩시를 코카콜라와 대등하게 만들며 경영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존 스컬리. 잡스는 존 스컬리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당신의 남은 인생을 까만 설탕물을 만들어 파는 데 허비할 생각인가, 아니면 나와 함께 미래를 바꾸는 매력적인 일에 동참할 것인가?"
나라도 당장 잡스의 손을 잡고 싶어진다. 아마 존 스컬리도 그랬나 보다. 20대 초반 새파란 애송이의 당돌한 말이었지만 존 스컬리에게는 그런 것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았을 것이다. 존 스컬리는 바로 애플의 두번째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아름답게 끝나지는 않았다. 알려진 것처럼 수년 후 존 스컬리가 주동이 되어 스티브 잡스를 애플에서 쫓아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러니한 사건은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 내기 위한 전조인지, 절치부심한 잡스는 십수년 후에 다시 애플로 복귀해 더욱 화려한 애플의 제2의 전성기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는 시대의 거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만들어 냈던 것은 단지 매력적인 물건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는 어쨌든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하여, 세상을 따라가며 돈을 걷어들인 기업가라기 보다는 세상 사람들을 꿈꾸게 한 몽상가에 더 가까웠다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시대의 풍운아 잡스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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