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이 은퇴했다. 며칠 지나긴 했지만 오늘 올시즌 개막이고 보니 문득 생각이 난다. 종범이 형이 유니폼을 벗었는데 뭔가 한 줄 안 남기기도 그렇고.. 이래저래 짠한 마음이다.
사실 별 유명하지도 않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그간 이종범 선수에 관한 비판 글 하나 올렸다가 웬 잡다한 인간들의 구저분한 태클들을 받다보니 또 이종범에 대한 글을 올리는 게 영 껄쩍지근하긴 한데, 뭐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랴.. 내가 그래도 그의 야구인생을 20여년 가까이 지켜본 야구팬으로서 차마 한마디 언급치 않고 지나갈 수가 없다. 이것은 그에 대한 나의 개인적 예우니까. ^ ^
난 해태 또는 기아 팬도 아니지만 이종범 선수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평가를 서슴치 않는 사람 중 하나다. 단언컨대 프로야구 30여년간 그는 독보적인 수퍼스타였다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난 원년부터 프로야구를 지켜봐온 왕팬이다.) 그간 수없이 많은 스타들이 명멸해 갔지만 그에 견줄 수 있는 초특급수퍼울트라 스타는 없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도 명예의 전당이 있지만 만약에 한국에 야구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단연 제일 윗자리는 이종범의 차지가 되어야 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만큼 그의 족적은 뚜렷하고 깊었다. 역대 그 어느 선수와도 비슷하지 않고 그 어느 선수와도 견줄 데가 없는 말 그대로 특출난 존재였다. 앞으로 계속될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에, 미래의 일은 알 수가 없지만 그가 남긴 독보적 흔적은 아마도 좀체 지워지기 힘든 자욱으로 계속 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운동선수를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가지일 것이다. 당연히 뛰어난 성적이야 말할 것도 없고, 뛰어난 매너, 성실한 자세, 문제 없는 사생활.. 이 모든 것이 어우러졌을 때 우리는 수퍼스타라고 부른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정수근 같은 선수가 왜 잊혀진 선수에 머물고 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야구선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잘 했다. 그가 보여준 능력을 비슷하게나마 보여준 선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안타, 홈런, 주루, 도루, 수비, 작전수행능력할 것 없이 모든 부문에서 특A급에 해당하는 능력을 보여준 유일무이한 선수였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아무리 운동계와는 먼 사람이라도, 각자 쓰는 근육이라든가 운동방식이 다른 정도는 아는데, 그것을 생각하더라도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신묘한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딱딱한"과 같은 이질적인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4차원의 능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솔직히 이종범이 가진 재능 중에 한가지만 가져도 주전으로 1군에서 살아남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대개 수비가 좋은 선수는 타격이 약하기 마련이고, 단타를 잘 치는 빠른 선수는 장타에는 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종범은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특A급으로 해냈다.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잘 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 신기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이승엽과 이용규와 이대형과 박진만, 이 선수들을 하나로 모은다면 이종범이 된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명백히 이종범은 최소한 3인분의 활약을 했다. 그것도 초A급 선수 3명의 역할을. 아마도 가난한 구단 해태의 형편에서 3인분의 연봉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너절한 구단의 소년가장 역할까지 해야 했을 것이다. 구단주나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3명 역할을 한 명이 했으니 얼마나 든든했을 것인가. 10명과 12명이 싸웠으니 해태가 강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도대체 대응이 불가능한 선수가 이종범이었다. 솔직히 이대호 같이 큰 것을 잘 치는 선수라도 여차하면 그냥 걸러 버리면 그만이다. 1루에 나간 이대호는 그냥 장승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종범은 내보내도 우환덩어리였다. 1루에 나가는 순간 3루까지는 포기해야할 지경이었으니까. 한 시즌에 80도루 이상을 하는 것은 이대형이 3할3푼 이상 치지 않는 이상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솔직히 상대편 감독 입장에서는 이종범이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작전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완벽에 가까운 선수였다.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을 만큼의 천재적 재능을 보여줬던 이종범이 아들뻘에 해당할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이, 그가 단순히 천재일 뿐만 아니라 그의 부단한 노력과 성실함을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무대 밖으로 퇴장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소 매정한 말일 수는 있지만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인다는 차원에서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나는 보았다. 그것은 그 누구도 결정해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3년전 기아가 우승했을 때 그가 물러나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선수생활을 연장했다. 그것은 그의 판단이니까 뭐라할 수 없는 것이긴 하다. 그는 아직도 보여줄 것이 더 남았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런데 올해 이렇게 황망간에 그의 퇴장을 맞고보니 역시 타이밍의 시점이 조금 애매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결정내리지 않은 사이에 결국 타의에 의해서 결정이 내려지는 모양새가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예상되던 결과였다. 조범현 감독이 물러나고 선동렬 감독이 부임할 때, 나는 사실 그의 역할 중에 이종범의 거취문제가 역할 내용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는 스토브 리그를 무사히 넘기고 새로운 시즌을 코 앞에 두게 되었다. 올해도 계속 가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찰나, 갑자기 그는 은퇴로 내몰리게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밀려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 아름답지 못하다. 난 은퇴시점이 늦었다고 생각하는 부류이긴 하지만 이종범 개인의 판단에 대해서는 존중한다. 그것은 그 누구도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구단이 선동렬을 감독으로 부임시킬 때 이미 이종범의 거취에 대해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면 진작에 그와 관련한 입장 표명을 하고 이종범 개인에게 충분한 판단의 시간을 줘야했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시즌이 임박한 시점에 내치는 것은 불멸의 수퍼스타에 대한 예우도 아닐 뿐더러 팬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기아 구단은 명백히 잘못 판단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스윙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범타나 파울이 될 수 밖에 없다. 기아 구단은 타이밍을 잘 못 맞췄다. 누구를 위한 퇴출인지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과연 이것이 최선이냐고.
최동원이 죽고 나서야 롯데구단은 그의 백넘버를 영구결번하고 최동원데이를 하네 어쩌네 하면서 설레발을 쳤다. 자신들은 체면치레도 하고 고인을 이용해 마케팅도 하고 이래저래 좋을지 모르지만 그걸 지켜보는 팬의 입장에서는 못내 씁쓸한 마음을 지울 길 없었다. 한창 물이 올랐을 시기의 최동원을 삼성으로 내쫓고, 그 이후 한 번도 롯데에 불러들이지 않고 낭인 생활을 하도록 방치한 구단이 뒤늦게 그가 죽고 난 이후에 팬들 눈치보며 한 이벤트로는 참으로 고약하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홈런이 될 것도 땅볼이나 파울플라이가 되고 마는 것이 야구다. 기아 구단은 명백히 타이밍을 잘 못 맞췄다. 대한민국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초특급 수퍼스타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다. 이종범은 그 자체로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일 뿐 아니라 기아 구단의 자산으로 남을 것이 틀림없다. 좀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두고두고 구단에 돈을 벌어주는 아이템이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를 이렇게 허덥하게 취급해도 되는가. 도대체 기아 구단은 경영 마인드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하는 짓을 보면 롯데나 LG에 뒤지지 않는다.
아마도 한국 프로야구에 다시 나타나기 힘들 초특급수퍼스타를 이제 떠나보내야 한다. 그와 함께한 시간들이 즐거웠다. 특출난 재능을 가진 선수는 그 자체만으로 뛰어난 컨텐츠인데, 이종범은 뛰어난 자기관리 능력까지 보여주었다. 동료선수들 뿐 아니라 팬들에게도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존재 자체가 한국 프로야구의 위상을 한 단계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동안 수고했다. 이 말을 꼭 하고싶다. 그가 이 글을 보든지 그렇지 않든지.
종범이 형, 그동안 즐거웠소.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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