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저차한 이유로 야구에 대한 흥미도 시들하고 해서 별로 보기 싫었는데,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스포츠이자 내가 알고 즐기는 스포츠가 야구 밖에 없기에 슬쩍슬쩍 아니 볼 수 없게 되었다. 쩝스~
뭐 별달리 볼 것도 없고 딱히 구미가 땡기는 것도 없는지라 최근에 두어 게임 스쳐봤는데, 참으로 기묘한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아마도 재론의 여지가 없이 꼴찌 다툼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었던 두 팀, 넥센과 LG가 중위권에 당당히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뭐 아직 10여 경기 밖에 하지 않은 시즌 초긴 하지만 일단 이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NC가 아직 리그에 진입하지 않아 여전히 정을 떼지 못하고 있는 LG.. 그
LG가 특히 눈에 띄는데, 그건 뭐 예상 외로 성적이 좋아서가 아니다. 초장 성적이야 작년에도 놀라웠다. 그리고 가을야구에 대한 오랜
갈증을 풀어주나 싶었다. 그러나 초장끗발 개끗발이라고, 가을야구에 대한 기대는 역시나 희망고문일 뿐, 여름의 끝과 함께 여지없이 제자리로 돌아와버리고 10년째
리빌딩이라는 스토브리그 후렴구를 또다시 들어야 했다. 이젠 성적 가지고 LG구단이 팬들의 관심을 끌긴 힘들어 보인다. 그러기엔 너무 지쳤다.(-.-)
그런 와중에, 최근 곁눈으로 본 게임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정성훈이다. 박찬호에게서 영양가 만점짜리 홈런을 때려내더니 급기야 한화 에이스가 아니라 '대한민국 에이스'인 류현진을 상대로 홈런을 뽑아내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말을 들어보니 4게임 연속 홈런이란다. 이거 참..
사실 지난 시즌이 끝나고 LG가 김기태를 감독으로 선임했을 때, 내심 시큰둥 했었다. 선수로서 지켜본 것 외에 김기태의 지도자로서의 역량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다지 썩 만족스럽지 않는 기용이라고 나는 느꼈다. 뭐 그건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 시점에 와서 보면 정성훈을 4번으로 세운 것은 정말 탁월한 안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큰 거 한 방이 부실하던 LG 타선에 그나마 한방맨으로 중심을 잡아주던 조인성을 SK로 팔아버리고 나니(솔직이 이건 지금도 미스라고 나는 생각함) 정말 타선이 허해졌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버텨야 되는데 잇몸마저 내려앉아 버린 꼴이라고 할까. 타선이 타 팀에 비해 허접한 것은 아니지만 한방맨이 없다는 것은 역시 상대 투수가 볼 때 위협감이 훨씬 떨어지는 것이다. 연타를 맞지 않는 한 실점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니까.
지난 겨울 최희섭이 시장에 매물로 나왔을 때, 나는 LG가 가장 유력한 영입 후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LG는 별 흥미를 못느꼈는지 대포가 필요치 않은 것인지 영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이한 올 시즌, 김기태 감독이 내놓은 카드는 놀랍게도 정성훈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희한한 패를 던진 것이다.
누구는 "신개념 4번 타자"라고 하던데,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고 익숙해진 개념의 4번 타자는 분명 아닌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어서 그런 측면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성공적인 기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풀스윙으로 한방을 노릴 때는 노리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갖다 맞춰서라도 치고 나가는 '다양한 쓸모'를 정성훈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그가 보여준 영양가 만점의 홈런포는 게임의 재미를 북돋우는 만점짜리 한방이 아닐 수 없다. 7회까지 호투하던 박찬호에게서 역전 홈런을 터뜨려 배패의 쓴잔을 마시게 하더니 어제는 9회까지 잘 던진 '괴물 류현진'을 홈런으로 두드려 9이닝 1실점 패전의 벼랑으로 몰고가기도 했다. 장성호가 9회말에 게임을 원점으로 돌려놓지 않았으면 패전을 안았을 것이다.
솔직히 정성훈이 그다지 장거리형 타자는 아니었다. 어느날 갑자기 힘이 불끈 솟은 것도 아닐 테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4번 타자라는 역할이 그를 4번 타자로 만들어 준 것일 지도 모른다. 어쨌건 중요한 것은 그가 4번 타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고, 김기태 감독의 노림수가 제대로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정성훈은 가끔 희한한 언행으로 4차원이라는 소리를 듣곤 하는데, 이젠 그라운드 위에서도 4차원적 플레이를 펼쳐보이는 것같다. 암튼 희한한 4번 타자가 만들어진 것은 틀림없다. '큰 것만 노리는' 것보다 '큰 것도 노리는' 4번 타자는 일단 영양가 면에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여차하면 넘어간다는 중압감도 주면서도 쉽게 물러나지 않고 투수를 괴롭히는 것은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김기태 감독이 정성훈의 포텐을 꿰뚫어보고 노림수를 던진 것인지, 어찌할 수 없어서 내밀었던 미봉책이 제대로 걸려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전자라고 한다면 이것은 가히 '신의 한 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수운용 또는 용인술이 감독의 중요한 역량이라고 할 때, 적어도 정성훈을 4번에 앉혀서 성공적으로 역할을 수행하게 만든 것은 김기태 감독의 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약발이 언제까지 갈 지는 알 수 없지만 김기태의 '신의 한 수'를 보는 재미가 당분간 쏠쏠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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