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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옥세설(褐玉世說)

칸첸중가神과 오은선만이 아는 진실 따위, 세상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먼저 밑밥을 깔아 놓자면, 나는 산악인 오은선이 칸첸중가 정상을 등정하고 내려왔다는 것을 믿는다. 아니, 믿을 것이다. 동시에, 믿음이란 행위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 오로지 그 대상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에 한한 것이며 따라서 이 글에서 논하는 내용과는 절대적인 인과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갈옥白>


서울방송의 의혹제기 방송 프로그램 이후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의 진위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등정 직후부터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던 것인데, 올 봄 즈음 안나푸르나를 마지막으로, '여성 최초 14좌 완등'의 명예가 더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스포츠 종목도 아니고 산악등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쉬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 사실 좀 당황스럽기도 하다. 더구나, 야구나 축구는 명백한 룰이 있고 여러 대의 카메라와 최소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명의 사람이 지켜보는 데서 하는 것이라 논란이 일어날 여지가 별로 없는데 반해, '등반'이라는 것은 아무리 상업화가 되었다 해도 기본적으로 산악인들의 양심과 도덕성을 바탕에 깔고 있는, 어찌보면 신성한 스포츠이기 때문에 그런 추잡한 사건이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공 가지고 노는, 기본적으로 '놀이'에서 출발한 스포츠와, 목숨을 걸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진지하고 엄숙한 스포츠와의 차이는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산악인이 산을 오르는 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범주에 속해 있었다. 만약 그것마저 지켜지지 않고 걸레가 돼 버린다면 산악인들의 목숨을 건 등반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데 목숨을 거는 너저분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릴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반 논란은 한 개인의 기록과 명예의 문제가 아니라, 산악등반이라는 행위 자체의 존재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극한을 통한 인간 의지의 표현'에 먹칠을 할 중대한 사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산악등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전문적인 식견을 내놓을 수는 없다. 대한산악연맹에서 전문가들이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을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을 보니 과연 논란의 여지는 분명히 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다만 나는 상식인으로서 오은선이 이 사안에 대해 대응한 언행에 대한 것을 지극히 평범한 수준에서 다시 한번 복기를 해보려고 하는 것 뿐이다. 그리하여 이 문제가 가지고 있는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문제, 즉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반 논란이 결국 오은선 스스로의 실책(혹은 잘못)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임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이루었다고 하자. 그 경우, 그 행위가 사적인 행위일 때는 나만이 그것을 증거하면 된다. 그것은 오롯이 나의 개인적인 성취감과 만족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남이 알든 모르든, 또는 뭐라고 하든 문제될 것이 없다.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혹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만 아니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나와 그 사실(성취한 행위)만이 유의미하며, 그것은 이 우주에서 오직 나에 의해서만 의미가 발생되는 특별한 이벤트가 되는 것이다.

반면 어느 한 개인의 행위가 단순히 개인적인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행위가 되려할 때, 그것은 반드시 세상의 검증을 받아야 하고 확인가능한 증거를 보여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실제 그 행위의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육상에는 '공인기록'이라는 것이 있다. 국제육상연맹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경기에서 나온 기록만 공식적인 기록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우리집 뒷마당에서 100미터를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빠른 9초 4에 뛴다한들 그것은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성취일 수 있어도 사회적으로는 공허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공인활동은 그 분야에서 인정할 수 있는 공식적인 과정을 밟고 그것을 증명해 낼 수 있을 때 인정받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학문 활동을 보면 극명하게 알 수 있다. 그 숱한 논문들이 왜 존재하겠는가. 내가 그냥 '이러이러한 것을 알아냈다' 하고 떠드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사고의 기본적인 전제와 유추과정을 알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최종 결과물이 이론의 여지 없이 논리적으로 증명됨을 보여줄 때 비로소 그것에 대한 지적소유권이 그 사람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세계 3대 수학난제를 풀었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을 수식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의 주장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학문이란 것은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부분이 있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행위의 대표적인 것이 기업활동(또는 조직생활)이다. 반면 학문이나 공인기록 같은 것은 예외 없이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시 된다. 과정이 전제되지 않는 결과는 개인적 성취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인류문명의 성장과 발전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 일회성 이벤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설이 길었다. 다시 오은선 문제로 돌아가 보자. 오은선은 칸첸중가 정상을 밟고 왔다.(그렇게 믿어진다.) 하지만 그의 그 행위를 사회적으로 공신력 있게 인정받게 해줄 증거가 없다. 아니 매우 부실하다. 그래서 그의 그 목숨을 건 사투는 '억울하지만' 인정을 받을 수 없고, 심지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오롯이 오은선 자신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 설사 억울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런 것이다. 그게 싫다면 세상 사람들이 입도 달싹 못할 만큼 명백한 증거를 내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오은선 자신의 의무이다. 엄한 칸첸중가 신은 이 문제에 대해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복기해보자. 문제가 불거지고 1년이 되어 가는 이 시점까지 오은선은 입으로만 증거할 뿐 아무런 물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는 칸첸중가 정상에 갔다오지 않은 것이다. 오해 마시라. 다시 말하건대, 설사 오은선이 칸첸중가 정상을 밟고 왔다 하더라도 칸첸중가 정상을 밟고 온 그 행위는 오로지 오은선 개인의 행위일 뿐 사회적 행위로는 갔다오지 않은 것이란 말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오은선 스스로 얘기했듯이 '칸첸중가神과 나(오은선)만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은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의혹들에 대해 나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 코 앞까지 갔다가 그냥 내려온다는 것도 이치적으로 안 맞는가 하면 또 동시에 수원대 깃발과 등정속도, 정상사진 등의 의혹들도 분명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만약 오은선이 진짜로 정상에 오르지 않았다면, 당시 현장에서는 그곳(사진 찍은 곳)이 정상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하산하고 나서 어느 시점에 자신의 실수인 것을 알았지만 여러가지 사회적 이유(명예, 스폰서 기업과의 관계, 금전문제 등)로 차마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상황에 처해버렸을 수 있다는 추측을 할 뿐이다. 어쨌든 그런 가정들을 모두 포함하여, 오은선의 실책이고 책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오은선이 정상을 밟고 온 것을 믿을 것이다. 다만, 설사 정상을 밟고 왔다해도 그 증거를 남기지 않은 것은 명백히 실수이며(프로로서 있을 수 없는 중대한 실수이다. 거기에 들어간 돈이 얼마며, 지켜보는 눈이 또한 얼마인가. 정상을 밟는 것만큼 증거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오은선이 14좌 완등으로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명예를 깡그리 부정할 수 있고 또 부정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실책이다.

나는 왜 그런 실수가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알 수 있고 또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약 오은선이 정상을 밟고 왔다 하더라도 그런 결정적 실책을 했다면 그의 위업은 부정되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며 그 모든 찬사와 명예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은선 자신 밖에 없다. 억울할 것도 없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억울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점, 오은선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결정적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칸첸중가 신을 데려오지 않는 한 세상의 인정을 받기는 힘들 것이다.